모차르트는 마오 주석을 생각한다
모차르트는 마오 주석을 생각한다
  • 글벗
  • 승인 2024.03.13 0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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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자크와 바느질하는 중국 소녀

1960년대는 격변의 시기였다. 베트남 전쟁은 모를 수렁 속으로 빨려 들어가고, 2 대전 이후 베이비 부머 세대가 청년기에 접어 들면서 마오쩌둥과 호치민이 새로운 지도자상으로 부상했다. 한편에서는 히피와 프랑스 68세대의 자유함이 시대를 대변했다. 중국에서는위대한 인간실험 위해 많은 사람들이 농촌지역으로 강제 하방되었다. 문화대혁명의 시작이었다. 서구의 혁명과 달리 철저하게 위로부터 주도된 실험이고 혁명이었다.

중국 출신의 프랑스 작가 다이 시지에는 1954년생으로 1971 가족과 떨어져 3년간 청두 지역의하늘 꼬리 지명인 시골로 하방된 재교육을 받았다. 현재 중국의 주석 시진핑은 1953년생인데 그도 하방 가족 출신이다.

문화혁명시기는 중국 역사상 암울한 시기였지만 속에서도 젊은이들은 다양한 방법으로 견뎌내며 성장해 나갔다. 다이 시지에는 프랑스에서 영화 공부를 했으며 2000 장편소설발자크와 바느질하는 중국 소녀’(이원희 옮김, 현대문학) 통해 프랑스 문학계에 데뷔했다.

소설은 산골에서재교육 받던 작가의 자전적 소설이다. 모든 책이 금지된 상태에서 프랑스 작가 발자크를 비롯한 다른 서구작가의 책들을 얻게 소년들은 책이 해어지도록 돌려 읽는다. 사실은 책들은 다른 하방 소년의 것이었는데 책이 발각되는 순간 모멸적인 치도곤을 당할 수도 있기에 도둑맞은 소년이나 훔쳐간 소년이나 모두 함구해야 하는 상황에서나 일어날 있는 일이었다.

아직 청춘의 혼돈 상태에 빠져있는 열아홉의 숫총각이 애국주의, 공산주의, 이데올로기와 정치운동에 관한 혁명적 장광설밖에 모른다고 생각해보라. 그런데 갑자기 그 작은 책은 침입자처럼 나에게 욕망과 열정과 충동과 사랑에 눈을 뜨라고 말하면서, 그때까지 고지식한 벙어리에 지나지 않던 내게 세상에서 벌어지는 온갖 것들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었다.

 

문맹인 산골 사람들에게 이야기의 진실 여부는 중요하지 않았다. 소설 주인공인 ‘나’와 친구 뤄는 읽지 않은 책에 대해서도 ‘구라’를 섞어 이야기하며 힘든 재교육 생활을 즐겼다. 이들의 ‘재능’을 높인 산 마을의 원로들은 이웃 큰 마을에 영화가 들어오면 소년들을 보내 영화를 보게 한 뒤 그들이 재연하는 영화 이야기를 들으며 웃고 울었다.

뤄는 실로 얼마나 뛰어난 이야기꾼인가! 급성말라리아에 걸려 사경을 헤매는 와중에서도 그는 단순히 무성의 대사가 나오는 순서를 바꾸는 것만으로도 청중의 마음을 움직이게 할 수 있었다.

 

‘나’는 마을에 도착한 첫날부터 마을의 원로들 앞에서 바이얼린을 연주해야만 했다. 모차르트의 소나타 연주를 듣고 시큰둥한 원로들에게 바이얼린을 압수당할 위기에서 ‘나’는 다음과 같은 말로 위기를 넘길 수 있었다.

모차르트는 언제나 마오 주석을 생각한다.

 

 

뤄는 바느질하는 소녀와 사랑을 나누고 임신도 시키고 불법 낙태도 시킨다. 어쩌면 창작을 위해 끌어들인 가상의 인물이고 작가 자신인 이야기일 수도 있다. 재교육이 끝나면 도시로 돌아갈 지식인 가정 출신의하늘 꼬리 글을 읽지 못하는 산골 소녀와의 사랑은 아무리 문화대혁명을 통해 인간개조가 되어도 불가능한 것이었다. 소녀는 뤄에게 매달리지 않은다. 글을 읽는다고 무지한 것은 아니다. 소년들에게 책을 훔치자고 처음 제안한 것도이라는 사물의 존재를 처음 알게 바느질 소녀였다. 소녀는 통해 새로운 세상에 떴기에 마을을 떠나 넓은 세상으로 향한다. 따라서 책은 이루어질 없는 사랑 이야기가 아니라 이야기다.

뤄는 소녀에게 책이야기를 해주면서 이렇게 다짐했었다.

이 책들로 나는 바느질 처녀를 딴사람으로 만들어놓겠다. 그애는 이제 더 이상 단순한 산골처녀로 살아가지 않을 것이다.

외부 세계에서 문화 대혁명은 야만적 사건이지만 다이 시지에의 경험 그것에는 사랑과 이별도 있고 책도 있고 음악도 있었다. 다이 시지에는 문화대혁명에 대해 비판적 시각을 갖고 있는 사람일까? 역사적 의미를 발견하는 사람일까? 비슷한 경험을 시진핑의 통치 스타일은 문화대혁명시기 만큼은 아닐지라도 당시와 비슷해 보인다.

이것 하나는 분명하다. 프랑스의 6.8혁명의 슬로건은금지라는 말을 제외하고 모든 금지를 금지한다였다. 다시말해 금지라는 말만 하지 말라는 무한 자유가 68 정신이었다면 문화 대혁명은 모든 금지를 통해 인간을 개조하려 했다. 소설에서는 공교롭게 금지 속에 아름다움이 있었으니 금지를 탓할 것만은 아닌 같기도 하다. 성서에서 금단의 열매는 아담과 하와가 낙원에서 쫓겨나는 단초를 제공했지만 그로 인해 사람의 이야기가 시작되었으니 또한 흥미로운 아이러니 아닌가?

독일에서 활동하는 철학자 한병철은 그의 투명사회’(김태환 옮김, 문학과 지성사) 통해 우리가 건전한 사회의 기준으로 여기는 투명사회를 비판한다. 이것도 같은 맥락일까? 금지가 없는 사회는 모든 것이 허용되는 가장 투명한 사회일 터이니 말이다. 이북에 담겨있는투명사회 아직 읽지 않아 자세한 말은 여기서 삼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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