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주의를 사랑한 방송인, 평화를 살아낸 신앙인

  • 기사입력 2025.05.08 09:14
  • 최종수정 2025.05.09 07:58
  • 기자명 최병인

2025년 봄, 뉴욕의 한 양로원. 창가에 앉아 잔잔한 햇살을 받으며 성경을 들춰보는 노인이 있다. 90을 넘긴 나이에도 그녀의 눈빛은 여전히 맑고 깊다. 그 이름, 김명숙. 한때 한국 방송계를 이끌던 여성 선구자였고, 한인 사회의 존경받는 원로였다.

정광채 전 흥사단 뉴욕지부 회장은 이렇게 회고한다.

“김명숙 선생님은 매우 유려한 대화 태도가 인상 깊은 분이었습니다. 누구와도 소통이 탁월했고, 언제나 재치 있고 맛깔 나는 대화 분위기를 이끄는 데 뛰어난 재능을 가지신 분이었죠.”

흥사단 뉴욕지회 회원들과 지난 사진을 놓고 추억을 되새기고 있다. @ 뉴스M
흥사단 뉴욕지회 회원들과 지난 사진을 놓고 과거를 회상하고 있다. @ 뉴스M

이야기는 단순한 ‘회상’을 넘어, 그녀가 걸어온 길의 의미를 다시 묻고자 한다. 김명숙이라는 인물은 한국과 미국을 가로지르며 민주주의와 평화, 그리고 공동체의 가치를 실현한 살아 있는 역사이기 때문이다.

1933년 평안남도 진남포에서 태어난 김명숙은 일제강점기의 어두운 시대를 견디며 성장했다. 1949년, 전쟁의 기운이 감도는 한반도에서 가족과 생이별하고 홀로 월남했다. 그 아픔은 그녀를 단단하게 만들었고, 삶의 방향을 결정짓는 굳은 신념으로 자리 잡았다.

1953년, 김명숙은 한국신학대학에서 신학을 공부했다. 그녀의 스승이었던 김재준 목사는 진보적인 사상과 실천을 강조했으며, 이는 김명숙 선생의 신앙적·사회적 태도에 결정적인 영향을 주었다.

이어 1977년, 홍익대학교 산업미술대학원에서 수학하며 예술과 문화에 대한 깊은 이해를 쌓는다. 이러한 복합적 지성은 그녀가 방송인, 종교인, 사회운동가로서 독보적인 위치에 서는 데 밑거름이 된다.

김명숙 선생은 1950년대 말부터 1984년까지 KBS와 TBC를 중심으로 활동하며, 대한민국 최초의 교양 방송 전문 MC로 자리매김했다. 그녀는 단순한 진행자가 아니라, 인문·사회적 메시지를 방송을 통해 전달하는 메신저였다. 당시 교양 방송은 매우 드물었기에, 그녀의 존재는 더없이 중요했다.

그녀의 신앙생활은 곧 사회참여였다. 1951년부터 1983년까지 강원룡 목사가 이끌던 경동교회에 몸담으며, 사회 정의와 민주화, 평화를 향한 신앙적 실천을 이어갔다. 이후 낙산교회를 거쳐, 미국 이주 후에는 롱아일랜드한브루클린한인교회와 뉴욕우리교회에도 꾸준히 공동체 활동에 참여했다.

통일운동가 이행우 선생 추모예배에 함께한 뉴욕의 인사들 @ 흥사단 뉴욕지회 제공 
통일운동가 이행우 선생 추모예배에 함께한 뉴욕의 인사들 @ 흥사단 뉴욕지회 제공 

1984년, 김명숙 선생은 미국 뉴욕으로 이주한다. 군사정권 아래의 한국을 떠나온 그녀는 이민지에서도 가만히 있지 않았다. ‘뉴욕목요기도회’, 6.15 미주위원회 뉴욕지회 제2대 회장, 미주 여신학자회 활동 등, 그녀는 이민 한인 사회의 심장부에서 끊임없이 민주화와 통일, 영적 연대를 위한 목소리를 냈다.

이 시기 그녀는 두 인물을 특히 깊이 존경했다. 바로 문동환 목사와 이행우 선생이다. 정광채 회장은 말한다:

“6.15 남북공동선언실천위원회 활동 시절, 김명숙 선생님은 문동환 목사님과 이행우 선생님을 매우 존경하셨습니다. 그분들로부터 많은 지도와 편달을 받았고, 정신적 유산을 실천하는 데 깊은 영향을 받으셨을 겁니다.”

이 말처럼, 김명숙 선생은 민주화와 평화운동의 원로들과 정신을 나누며 한인 진보 사회의 큰 어른으로 자리했다.

김명숙 선생의 지도력은 지시하는 방식이 아니었다. 그녀는 특유의 따뜻한 유머와 인간적인 소통으로 사람들의 마음을 여는 데 능했다. 모임에서든, 기도회에서든, 회의석상이든 간에 그녀는 언제나 대화의 분위기를 밝고 진지하게 만드는 사람이었다.

“말의 무게가 있는 분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무게는 억압이 아니라 신뢰에서 비롯된 것이었습니다.”

정광채 전 회장의 증언처럼, 그녀의 리더십은 권위가 아니라 존경에서 나왔다.

그녀의 남편 양우석 선생 역시 한국과 미국의 기독교계, 문화계, 기업계에서 의미 있는 발자취를 남긴 인물이다. 한국기독학생총연맹 초대 회장을 거쳐 서울 YMCA 부이사장, 공간사 대표 등으로 활동하며 기독교 신앙과 사회적 책임을 실천해왔다.

부부는 뉴욕에서도 서로의 믿음과 활동을 지지하며, 한인 교회와 지역 사회에 큰 기여를 했다. 그들은 말 그대로 ‘공동체적 부부’였다.

김명숙 선생의 삶은 자녀에게로 이어졌다. 아들 양호 씨는 민주평통 뉴욕지회장을 지내며 통일운동을 이어갔고, 며느리 홍유미 변호사도 지역사회 법률 전문가로 봉사 중이다. 가족 모두가 김명숙 선생의 정신을 이어가는 삶을 살고 있는 것이다.

흥사단 뉴욕지회 회원들이 김명숙 선생의 양로원을 찾아 즐거운 한때를 보냈다. @ 뉴스 M
흥사단 뉴욕지회 회원들이 김명숙 선생의 양로원을 찾아 즐거운 한때를 보냈다. @ 뉴스 M

이제 그녀는 육신적으로는 많이 노쇠해졌다. 그러나 뉴욕 양로원에서 조용히 살아가는 그 일상은 결코 ‘잊힌 삶’이 아니다. 흥사단 뉴욕지부에서는 김명숙 선생의 삶과 정신을 기록하고 공유하는 모임을 하고 있다.

그녀는 더 이상 무대에 서지 않지만, 그녀가 심어놓은 정신과 가치들은 다양한 방식으로 다시 피어나고 있다.

김명숙 선생은 단지 방송인이나 종교인이 아니었다. 그녀는 신념을 삶으로 살아낸 이 시대의 희귀한 인물이었으며, 한민족의 아픔과 희망을 함께 짊어진 지도자였다.

그녀가 보여준 삶의 방식은 지금도 우리에게 말을 건다. 민주주의를 위한 인내, 평화를 위한 용기, 공동체를 위한 배려는 시대를 초월한 가치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단 하나. 김명숙이라는 이름을 기억하고, 그녀가 걸어간 길의 의미를 되새기며, 그 가치를 다음 세대에 전하는 것이다.

“그분의 인생은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기억하고 이어나갈 때, 그 삶은 여전히 현재형입니다.”

이 글은 흥사단 뉴욕지부에서 자료 제공으로 작성된 글입니다.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개의 댓글
0 / 400
댓글 정렬
BEST댓글
BEST 댓글 답글과 추천수를 합산하여 자동으로 노출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수정
댓글 수정은 작성 후 1분내에만 가능합니다.
/ 400
내 댓글 모음
모바일버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