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티아 프릴랜드의 ‘플루토크라트(Plutocrats, 박세연 옮김, 열린책들)’는 오늘날 세계 경제의 가장 첨예한 문제 중 하나인 극심한 불평등을 정면으로 다룬다. ‘플루토크라트’는 그리스어로 '부(plutos)'와 '권력(kratos)'의 합성어로, 부와 권력을 동시에 거머쥔 최상위 부유층을 지칭한다.
과거의 부유층이 대대로 물려받은 재산으로 안락한 삶을 누렸던 귀족들이라면, 오늘날의 플루토크라트들은 완전히 다른 종류의 사람들이다. 이들은 대부분 자수성가한, '일하는' 부자들이다. 그런 점에서 헨리 조지가 ‘진보와 빈곤’에서 언급한 지대(地帶)에 의존하던 1세기 전의 부자와는 다르다. 월스트리트의 금융 전문가, 실리콘밸리의 기술 기업가, 그리고 러시아의 올리가르히(신흥재벌)들이 그 대표적인 예다. 이들은 자신들이 가진 능력과 노력으로 치열한 글로벌 경쟁에서 승리했다고 믿으며, 그에 따른 보상을 당연하게 여긴다. 이들의 부상은 단순히 돈을 많이 버는 것을 넘어, 현대 사회의 구조와 가치관을 근본적으로 뒤흔드는 사건이다.
플루토크라트의 등장을 설명하는 두 가지 핵심적인 요인은 글로벌화와 기술 혁명이다. 1970년대 이후 가속화된 이 두 가지 흐름은 국경의 장벽을 허물고, 자본과 아이디어가 전 세계로 자유롭게 흐르는 환경을 만들었다. 이로 인해 능력 있는 소수의 천재들이 전 세계 시장을 상대로 막대한 부를 쌓을 수 있는 '승자 독식(winner-take-all)'의 시대가 열렸다.
예를 들어, 과거에는 한 국가의 스타 기업가가 될 수 있었다면, 이제는 전 세계를 대상으로 비즈니스를 펼칠 수 있게 되었다. 실리콘밸리의 한 프로그래머가 개발한 앱이 전 세계 수십억 명의 사용자에게 도달하면서 순식간에 천문학적인 부를 거머쥐는 것이 가능해진 것이다. 이처럼 기술 혁명은 소수의 천재들이 거대한 규모의 경제적 가치를 창출할 수 있는 플랫폼을 제공했다.
글로벌화는 또한 전 세계의 노동 시장을 통합하며 서구 중산층에게는 고통스러운 압력을 가했다. 저렴한 노동력이 있는 개발도상국으로 생산 기지가 이전되면서, 선진국의 많은 숙련 노동자들이 일자리를 잃거나 임금이 정체되는 경험을 했다. 반면, 플루토크라트들은 이러한 변화를 활용하여 더 큰 이윤을 창출했다. 그 결과, 최상위 계층과 나머지 사람들 간의 소득 격차는 걷잡을 수 없이 벌어지게 되었다.
플루토크라트의 또 다른 특징은 그들이 더 이상 특정 국가나 민족에 얽매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이들은 전 세계를 오가며 비즈니스를 하고, 자녀들을 최고의 국제 학교에 보내며, 뉴욕, 런던, 싱가포르 등 세계 주요 도시들에 거주지를 둔다. 그들에게는 자국의 중산층보다 자신과 비슷한 생활 양식과 세계관을 공유하는 다른 국가의 플루토크라트들이 더 친숙하다.
이들은 국제적인 포럼인 다보스 포럼(Davos Forum)과 같은 곳에 모여 글로벌 경제와 미래에 대해 논한다. 이 공동체 안에서는 국적이나 인종의 경계가 무의미하며, 오직 부와 성공만이 그들을 연결하는 강력한 유대감이 된다. 이는 ‘나는 세계 시민’이라고 말하는 그들의 태도에서 잘 드러난다. 그러나 이러한 정체성은 그들이 자국 사회의 문제나 중산층의 고통에 무감각해지는 결과를 낳기도 한다.
이들은 대체로 자유 시장과 민주주의를 지지하지만, 자신들의 부에 대한 정당성을 훼손할 수 있는 세금 인상이나 규제 강화에 대해서는 매우 부정적인 태도를 보인다. 이들은 자신의 성공이 온전히 개인의 노력 덕분이라고 믿기 때문에, 사회적 재분배를 위한 노력에 회의적일 수밖에 없다. 이러한 태도는 사회의 통합을 저해하고, 민주주의의 위기를 초래할 수 있다는 점에서 심각한 문제로 지적된다.
사회적 이동성의 저해와 '사다리 걷어차기'
‘플루토크라트’는 오늘날의 불평등이 단지 경제적 격차를 넘어, 사회적 이동성까지 위협한다고 경고한다. 플루토크라트들은 자녀들에게 최고의 교육과 기회를 제공함으로써 그들의 성공을 대물림하려 한다. 고가의 사립학교, 특별 과외, 명문대 입학을 위한 치열한 경쟁은 부모의 재력 없이는 접근하기 어려운 기회들이다.
이러한 현상은 '열심히 일하면 성공할 수 있다'는 아메리칸 드림과 같은 사회적 신념을 무너뜨린다. 과거에는 개인의 노력과 재능이 사회적 상승의 주요 동력이었지만, 이제는 부모의 배경이 점점 더 중요한 요소가 되고 있다. 플루토크라트들은 스스로는 노력해서 부를 쌓았다고 말하지만, 그들이 구축한 시스템은 다른 사람들이 자신들의 위치로 올라오지 못하도록 '사다리 걷어차기'를 하는 결과를 낳고 있다.
프릴랜드는 이러한 불평등의 심화가 사회의 지속 가능성을 위협한다고 경고한다. 극심한 불평등은 사회적 불안과 갈등을 심화시키고, 결국 혁명이나 정치적 혼란으로 이어질 수 있다. 역사를 통해 볼 때, 소수의 엘리트들이 부와 권력을 독점하고 이를 유지하려 할 때 사회는 쇠퇴의 길을 걸었다. 오늘날의 플루토크라트들이 이러한 역사의 교훈을 간과한다면, 현대 자본주의 시스템 역시 근본적인 위기에 직면할 수 있다.
‘플루토크라트’는 단순히 부자들을 비판하는 책이 아니다. 오히려 이 책은 자본주의가 어떻게 변화하고 있으며, 그 변화가 우리 모두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고 있는지를 객관적으로 보여준다. 프릴랜드는 우리가 이 문제에 대해 더 이상 외면해서는 안 되며, 불평등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사회적 합의와 제도적 노력이 필요하다고 역설한다.
이 책은 '승자'로 남은 플루토크라트들뿐만 아니라 '나머지 모두'가 함께 고민하고 행동해야 한다는 다소 뻔한 결론으로 끝난다. 하지만 극심한 불평등은 더 이상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 전체의 문제이며, 지속 가능한 미래를 위해서는 부의 재분배와 사회적 이동성을 회복할 수 있는 새로운 해법을 찾아야 한다는 불편한 진실은 일깨워 주었다.
이번 책 : 크리스티아 프릴랜드, '플루토크라트'
지난 책 : 기 드 모파상, '목걸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