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스라엘–팔레스타인 분쟁을 둘러싼 세계적 담론은 흔히 ‘유대인 대 아랍인,’ ‘이스라엘 대 팔레스타인’이라는 단순한 이분법으로 흐른다. 그러나 유대교 내부를 조금만 들여다보면, 이 서사는 사실과 멀다. 특히 초정통파 유대교(하레딤) 전통 안에는 팔레스타인 민중의 고통과 연대하며, 현대 이스라엘 국가 자체를 신학적으로 비판하는 흐름이 존재한다. 이들은 단순히 몇 명의 ‘반골’이 아니라, 카발라(Kabbalah)–하시딤(Hasidim) 전통을 이어받은 종파들이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바로 네투레이 카르타(Neturei Karta)다.
하시딤 운동은 18세기 동유럽에서 카발라 신비주의에 기반해 탄생한 경건주의 운동이다. 인간의 노력만으로는 도달할 수 없는 신적 영역을 관계성·겸손·영성 속에서 체험하려는 흐름이며, 세속 정치보다 신적 섭리와 내적 변혁을 더 중요하게 보았다. 이 전통은 이후 여러 분파로 나뉘었고, 그중 일부 초정통파 집단은 시온주의와 철저하게 거리를 두었다.
대표적으로 사트마르(Satmár)와 네투레이 카르타가 있다. 둘 모두 현대 이스라엘 국가를 율법적 근거에서 문제시하며, 특히 네투레이 카르타는 이를 보다 적극적으로 실천한다. 이들은 단순한 ‘정치적 의견”이 아니라, 유대교 신학의 핵심 문서인 탈무드의 ‘세 가지 맹세(Three Oaths)’에 기초한다.
‘세 가지 맹세(Three Oaths)’—반시온주의의 신학적 뿌리
탈무드(특히 케투봇 111a)에 따르면, 바빌론 포로기 이후 하나님은 이스라엘과 민족들에게 세 가지 맹세를 부과했다는 전승이 있다.
1) 이스라엘은 강제로 집단 귀환(알리야)을 시도하지 않는다.
2)이스라엘은 이방 민족을 대항해 폭력적 반란을 일으키지 않는다.
3) 이방 민족들은 유대인을 과도하게 억압하지 않는다.
초정통파 반시온주의자들은 특히 1번과 2번을 중시한다. 그들의 해석에 따르면, 메시아가 오기 전 유대 국가를 인간의 힘으로 세우는 것 자체가 율법 위반이며, 세속 정치권력을 통해 영토를 탈환하는 것은 신적 질서에 대한 오만한 도전이다. 따라서 1948년 이스라엘 국가의 탄생은 신학적으로 금기를 어겼으며, 그 과정에서 팔레스타인의 땅을 무력으로 점령한 것 또한 율법과 윤리에 어긋난다는 결론이 나온다. 네투레이 카르타가 팔레스타인 주민들과 연대하고, 가자·웨스트뱅크에서 활동하는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네투레이 카르타는 하레딤 내부에서도 극히 소수지만, 그 상징성은 매우 크다. 이들은 하시딤 전통과 카발라적 경건성 위에, 세 가지 맹세에 대한 문자적·신비적 해석을 결합한다. 그 결과 현대 이스라엘 국가는 신성모독이며, 유대교의 이름을 빌려 폭력을 정당화하는 것은 ‘가장 큰 죄’라고 본다.
이들은 국제무대에서 팔레스타인 편에 서기도 하고, 팔레스타인 주민들의 장례식이나 집회에 참여하기도 한다. 때로는 이스라엘 내부에서도 ‘배신자’라 불리며 공격받지만, 네투레이 카르타는 ‘진정한 유대교는 비폭력과 연대에 있다’는 신념을 굽히지 않는다.
사트마르—거대한 반시온주의적 하시딤 왕조
사트마르는 하시딤 중에서도 매우 규모가 큰 종파로, 네투레이 카르타처럼 노골적 정치 행동을 하지는 않지만 반시온주의의 신학적 전통을 분명히 유지한다. 세 가지 맹세를 문자적으로 해석하며 메시아 이전의 유대 국가 설립을 거부하고 이스라엘 정부의 종교 정책과 군사주의를 강하게 비판한다. 사트마르 내부에는 “팔레스타인의 고통은 유대교 윤리의 문제”라는 랍비들의 가르침도 존재한다.
이처럼 유대교는 단순하지 않으며 시오니즘은 하나의 왜곡된 ‘정치 운동’일 뿐이이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유대교와 시온주의를 동일시한다. 특히 한국의 보수 담론에서는 미국 복음주의와 결합해 ‘이스라엘 정부=유대인의 집단적 의지’라는 전제를 당연하게 여긴다.
그러나 역사적으로 시온주의는 유대교의 종교적 전통이 아니라 하나의 근대적 정치운동일 뿐이다. 유럽의 진보 유대인, 사회주의 유대인, 노동운동 기반의 유대 단체들(번들, 래버 지온 등)은 오히려 팔레스타인과의 공존·평등을 주장했고, 하시딤·카발라 계열의 초정통파는 메시아 이전의 국가 설립을 신학적으로 거부했다. 유대교 안에는 친팔레스타인적 윤리와 신학이 오래전부터 존재해왔던 것이다.
이 모든 사실은 하나의 결론으로 모인다. 오늘날 국제정치 무대에서 강경한 목소리를 내는 극우 시오니즘은 유대교의 전부가 아니며, 오히려 유대교 내부의 방대한 스펙트럼 중 하나에 불과하다. 그럼에도 세계 여론에서는 유대인 전체의 의견과 이스라엘 정부의 정책이 동일시되는 일이 반복된다. 이는 유대교 전통의 다양성을 무시한 채, 정치적 실체를 종교의 본질로 오인한 결과다.
초정통파 반시온주의 종파들이 보여주는 것은 단순한 반대 의견이 아니다. 이들은 카발라–하시딤 전통 안에서 형성된 신학적 논리, 그리고 ‘세 가지 맹세’에 대한 문자적 해석을 통해, 국가주의와 군사력의 논리를 일관되게 거리를 두고 비판해 왔다. 그들의 신앙에서 중요한 것은 영토 확보가 아니라, 신의 때를 기다리는 겸손, 그리고 폭력의 대가를 헤아리는 윤리적 판단이다. 팔레스타인과의 연대 역시 그 연장선상에 있다.
따라서 이스라엘 정부의 강경한 정책을 비판한다고 해서 유대교 자체를 공격하는 것은 옳지 않다. 지금 강경파들의 배후에 있는 극우시오니즘의 문제다.
이러한 것은 유럽의 국가탄생과도 무관하지 않다. 1648년 베스트 팔렌 조약을 통해 현재의 ‘민족(사실은 종교)국가’가 생겨났다. 유대인들은 이를 보고 17~18세기부터 그들의 국가를 꿈꿔왔고 그 토양에서 오늘날의 국가 시오니즘이 싹을 텄다.
이와 별개로 유대교 내부에는 이미 자기 성찰의 언어, 비폭력의 언어, 타인의 고통을 외면하지 않는 신학적 양심이 존재해 왔다. 그것은 세계 언론이 주목하는 강한 목소리가 아닐지 모르지만, 분명히 오래된 전통이며, 오늘의 갈등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실마리를 제공한다.
‘누구의 목소리가 유대교를 대표하는가?’ 하나의 정치 세력이 종교 전체를 정의하도록 내버려 둬서는 안 된다. 초정통파의 반시온주의는 유대교가 단순히 민족주의적 정체성의 이름으로 동원될 수 없는, 더 오래되고 더 깊은 뿌리를 가진 종교임을 상기시킨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