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석(多夕) 유영모가 품은 사상가들
다석(多夕) 유영모가 품은 사상가들
  • 이정배 교수
  • 승인 2022.07.20 03:3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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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배 교수의 "내가 이해하는 다석(多夕) 유영모" 연재 (2)

이번 호에는 다석에게 영향을 주었던 동시대 사상가 및 사조들에 대해 언급을 할 것이다. 앞선 글에서 다석의 영향사를 <<天符經(천부경)>>에 이르기까지 종적 차원에서 설명했다면 여기서는 다소 시차는 있지만 횡적 관계망 속에서 다석 사상을 조망할 생각이다. 아무리 천재적인 사상가라 할지라도 시대의 영향 없이 홀로 우뚝 설 수는 없는 법이기 때문이다. 

다석과 그에게 영향을 준 사상가들
다석과 그에게 영향을 준 사상가들

다석 유영모에게 직간접적인 큰 영향을 주었던 사상가들을 재차 열거하면 다음과 같다. 신채호, 여준, 레오 톨스토이, 간디 그리고 우찌무라 간조 등. 이들 영향력이 날줄 씨줄로 엮이면서 다석사상, 곧 씨알철학이 생겨난 것이다. 혹시 이번 지면에 여백이 생긴다면 한글, 훈민정음에 대한 다석의 생각도 살펴볼 것이다. 역시 이전 글에서도 언급했던바, 다석은 한글, 곧 훈민정음을 <<天符經(천부경)>>의 골자인 천지인 삼재론의 빛에서 뜻을 찾고 구했다. 목하 전 세계 사람들이 사랑하게 된 한글은 다석에게 영향을 주기도 했으나 그가 뜻을 확대 재생산(창조)시키기도 했다. 그렇기에 향후 한류의 전개와 더불어 다석의 한글이해 또한 확산될 것을 소망한다.

 <<조선상고사>>의 저자 신채호는 다석에게 민족으로서의 ‘我(아)’에 대한 자각을 일깨웠다. 대종교에 몸담고 상해 임정에도 참여했던 신채호는 후일 아나키스트로 평가받아 부정적으로 취급받기도 했지만 사실 그의 민족이해는 씨알 사상의 단초가 되었다. 

주지하듯 역사를 ‘我(아)’와 ‘非我(비아)’의 투쟁이라 보았으나 그에게 ‘我(아)’는 고루한 민족주의 차원을 벗었고 약자의 우선성을 내포했다. 강대국들에 맞서 민족을 강조했으나 민족 안에서도 민중과 여성 등 약자는 항존했기에 이들을 ’아‘의 범주에 포함시킨 것이다. 당시 서구 열강들이 조선을 비롯한 한국을 정복하는 현실에서 의당 민족이 강조되었을 뿐 ‘아’는 주어진 상황 속에서 항시 달리 표현될 수 있었다. 그가 일제가 주입한 민족 폄하사관, 소위 恨(한)의 민족사를 거부하고 강감찬, 을지문덕, 광개토왕 등의 민족 영웅들 역사, 영웅사관을 소개한 것도 이런 맥락에서였다. 

다석은 이런 기저 하에서 대종교가 중시하는 <<天符經(천부경)>>의 중요성을 알게 되었다. 순수 우리말로 이 책 81자를 풀어냈고 신채호의 ‘我(아)’를 , 人中天地一(인중천지일), 즉 후일 그의 핵심 사상이 된 歸一(귀일)의 본원 처로 확대 시킨 것이다. 

여준이란 분은 그리 널리 알려져 있지 않으나 오산학교 시절 다석이 만났던 가장 중요한 사람 중 하나다. 남강 이승훈의 권유로 오산학교 교장이 되었던 그는 그곳에서 몽양 여운형의 친척인 여준을 만났고 그를 통해 불교 경전, 노자 <<道德經(도덕경)>> 등을 만나 읽고 연구하게 된 것이다. 어린 시절부터 유교경전에 익숙했던 다석이었으나 여타 동양경전에 대해서는 배움이 없었던 터라 여준을 통해 자신의 사유 지평을 넓힐 수 있었다. 해방공간에서 좌우합작 론을 주창했던 여운형 집안은 사실 동학교도였다. 그의 할아버지는 단양, 양평 등지에서 해월 최시형과 더불어 활동했던 분이기도 했다. 여운형은 후일 평양신학교에서 신학을 배우기까지 했지만 여준은 家學(가학)으로서 동양경전에 더욱 심취했던 것 같다. 따라서 이전 글에서도 말했지만 다석이 동학의 중요성을 인지 못 한 것이 필자에게 여전히 의아스럽다.

다석의 사상 속에 당대 지성인들에게 영향을 미쳤던 두 외국인이 있었다. 톨스토이와 간디가 그들이다. 주지하듯 톨스토이는 자신만의 바이블을 만들어 소위 비정통적인 기독교인의 삶을 살았다. 산상수훈이 그를 매료시킨 성서의 전부였고 실제로 그 정신대로 살고자 했다. 

다석이 특히 주목한 것은 러시아 정교회의 성직 제도와 사유재산제에 대한 톨스토이의 부정적 생각이었다. 우선 神人(신인) 간의 중개자 개념을 부정한 것에 다석은 동의했다. 성직자들의 중개 없이 인간은 누구나 신과 직접적인 관계를 맺을 수 있다고 믿은 탓이다. 예수조차 중개, 대리자가 될 수 없다는 최근 역사적 예수 연구가들의 견해와 흡사했다. 이런 이유로 정교회로부터 배척을 당했고 객사한 그의 장례식을 교회가 거부하기까지 했지만 살아생전 톨스토이는 산상수훈 정신만을 기독교의 본질이라 역설했다. 다석이 자신의 기독교 이해를 비정통이라 여긴 것도 톨스토이 영향 때문이었다. 사유재산제의 부정도 그를 가족들은 물론 교회로부터 미움을 받은 큰 이유였다. 사후 자기 재산을 시민단체에 기부키로 한 결정을 두고 유족들과 시민사회가 갈등했다. 다석이 자기 재산을 동광원에 기부하며 생을 마감한 것도 이런 사건이 배경 되었다. 

성자로 불리는 간디는 자서전 제목을 ’My Life is my message’로 적을 만큼 삶과 사상의 일치를 꾀한 존재였다. 인간은 누구나 예외 없이 거룩한 길을 걸을 수 있음을 확신시켰다. 하지만 자기 삶이 메시지가 되기 위해 인간은 거듭 貪瞋痴(탐진치)와 씨름해야만 했다. 정통 기독교가 말하듯 원죄 상태로의 인간 탄생을 거부했으나 몸을 지닌 인간의 獸性(수성)을 거듭 떨쳐 낼 것을 강조한 것이다. 조혼 탓에 부친 죽음 앞에서도 성욕을 참지 못했던 자신의 부족함을 드러냈던 간디였지만 이후 다른 삶을 펼쳤고 영국 식민지에 대행했으나 비폭력의 방식으로 적대감을 이겨냈으며 하루 일식을 하며 소유욕으로부터 자유 할 수 있었던 것이다. 

다석이 일식과 解婚(해혼)을 평생 삶의 지침으로 삼은 것도 간디의 영향이 컸다. 다석에게는 이것이 몸으로 산제사를 드리는 길이었던 것이다. 이런 생각은 일본 기독교인 우찌무라 간조를 만나면서 더욱 신학화 되어갔다.

물리학 공부를 위해 일본에 유학 갔던 다석은 거기서 무교회주의자 우찌무라 간조를 만났다. 이것은 이후 그의 제자들 - 예컨대 함석헌, 김교신, 김흥호 등 - 이 서로 정도차는 있었으나 무교회주의를 수용한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본래 양명학에 심취했던 우찌무라는 기독교를 수용한 이후 무교회주의자가 되었다. 루터의 以信稱義(이신칭의) 사상을 수용했으나 일체 교회 제도는 부정했으며 일본식 기독교를 만들고자 했다. 루터 대속사상에 근거하여 기존 형식에 무관하게 성서를 읽었고 깨친 은혜를 갖고 일본과 세상을 변화시키고자 하였다. 

하지만 동양정신에 몰두한 다석은 루터의 대속적 기독교를 수용키 어려웠다. 자기 몸을 산 제물로 바치는 일을 기독교의 본질이라 여겼던 것이다. 남의 생명을 먹고 생활할 수밖에 없는 일상에 오히려 대속적 의미를 부여했다. 예수 스스로도 자신의 몸을 줄여(십자가) 마음을 확장시키는(부활) 방식으로 하늘과 하나 된 분으로 보았으며 그 예수가 우리 또한 그 길로 부른다고 생각한 것이다. 

톨스토이가 촉발한 비정통적 기독교가 우찌무라 간조를 경유하며 동양적 기독교로 확장되었다고 볼 수 있다. 이 과정에서 간디가 말했던 탐진치의 극복이 골자이자 관건이었다. 이에 더해 다석은 이웃을 침략하는 일본적 기독교에 동의할 수 없었다. 김교신에 의해 가시화되었지만 다석 역시도 대속적 기독교 이상으로 일본적 기독교에 거부감을 표출했던 것이다. 다석이 <<천부경>> 속의 三才論(삼재론)에 기초하여 자신의 기독교 이해를 도모한 것도 이런 배경에서 이해할 수 있겠다. 무엇보다도 한글을 訓民(훈민) 차원이 아니라 백성을 하늘로 이끄는 天文(천문)이라 했고 한글을 통해 가독교를 표현하려는 창조적 노력을 경주했던 것이다. 지면 관계상 한글에 관한 다석의 설명은 다음 호의 주제로 남겨두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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