덜 없어 더러운 존재, 빈탕한데 맞혀 놀이
덜 없어 더러운 존재, 빈탕한데 맞혀 놀이
  • 이정배 교수
  • 승인 2022.09.17 03:0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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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배 교수의 "내가 이해하는 다석(多夕) 유영모" 연재 (6): 다석의 인간 이해

다석의 인간론을 쓰려하니 이미 앞에서 많은 이야기를 한 것 같다. 그도 그럴 것이 기독교에서 기독론- 예수이해 –이 인간 문제 해결을 위한 궁극적인 상수였던 까닭이다. 하지만 다석의 경우 인간을 예수에 종속시키지 않았다. 기독론을 유일무이한 절대적 교리로 여기지 않은 결과였다. 예수처럼 인간도 ‘빈탕(없이 있음)’의 독생자로 여겼을 뿐이다. 이웃 종교들도 하늘로부터 받을 것은 모두 다 받았다 했으니 기독교든 불교든 인간 이해에 있어 종교 간 차이도 없다.

지난 세월 형성된 서구 기독교의 두 유형, 가톨릭과 개신교의 두 신학원리들- 존재유비(Analogia entis)와 신앙유비(Analogia fidei)–에 의지해서 다석을 이해할 수 없다. 인간의 선험적 죄 성 자체가 부정되었기에 유비(가톨릭)나 역설(개신교)의 논리가 무용지물이 된 것이다. 이점에서 다석이 보여준 인간에 대한 존재론적 각성은 서구 어느 것보다 깊다하겠다.

이점에서 이 글 제목이 ‘덜 없어 더러운 존재, 빈탕한데 맞혀놀이’로 되었음을 유념할 필요가 있다. 앞서 본대로 하느님은 ‘없이 계신 분’이다. 인간이 하느님 형상이라면 그 역시 ‘없이 있어야 할’ 존재여야만 했다. 하지만 인간 속 獸性(수성), 탐진치로 인해 인간의 현존은 ‘덜 없는’ 상태에 놓였다. 한마디로 소유, 욕망 지향적인 존재가 되어 버린 것이다. 없음의 존재가 되지 못한 인간 상태, 곧 ‘덜 없음’을 소리 나는 대로 읽으면 ‘더러움’이 된다. 더러움은 깨끗함의 반대어로서 인간 실존의 모습이다. 그러나 이 때 더러움은 서구 기독교가 말했던 원죄와는 많이 다르다. 본래 인간은 없이 있는 존재, ‘바탈’로서 세상에 태어났던 까닭이다. 없이 있는 하느님이 바탈(얼)로서, 좀 더 넓게 화장시켜 말하자면 세상을 가득채운 영으로서 존재한다는 말이다.

하느님과 인간이 그렇듯이 하느님과 세상도 이점에서 不二(불이)적 관계 속에 있다. 인간과 세상에 대한 설명을 독점해온 서구 기독교로선 쉽게 납득하기 어려울 것이다. 탐진치 탓에 더러워진 인간은 자신을 깨끗게 하면 된다. 어기서 ‘깨끗’은 거룩을 표현하는 다석 고유한 언어로서 한번 ‘깨’어져서 ‘끝’을 보라는 뜻을 지녔다. 인간은 누구든지 자신 속 바탈에 의지하여 깨끗의 과정을 통해 ‘없음’에 도달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것을 하늘 계신 하느님의 거룩하심처럼 너희도 거룩 하라는 성서말씀의 본뜻이라 여겼다. 김흥호는 다석의 경우 인습화된 언어 ‘거룩’ 보다 ‘깨끗’이란 말을 더 선호했다고 전했다.

하지만 ‘없음’과 ‘있음’에 따른 인간이해는 좀 더 부연 설명이 필요하다. 주지하듯 기독교는 영혼을 자신의 육체보다 절대 우월하게 생각해 왔다. 그래서 곧잘 자신의 영혼을 하느님 형상과 등가로 여긴 것이다. 여타 피조물과 견줘 인간은 월등히 우월한 존재로 봤다. 이것은 제국주의 시대에 이르러 유색인에 대한 백인 우월주의로 확장되기도 했다. 아리스토텔레스 사상의 영향을 받은 토미즘 신학의 역할 탓이었다. 식물은 生魂(생혼)만을, 동물의 경우 생혼과 覺魂(각혼)을 그리고 인간은 이에 더해 靈魂(영혼)을 지녔다고 가르친 것이다. 생혼과 각혼은 죽음과 더불어 소멸하지만 영혼만큼은 지속하기에 신적 속성을 지녔다고 보았다. 몸속에서 자신의 영혼이 빠져나가는 것을 죽음이라 일컬었다.

하지만 최근 場(장, Field)이론을 근거로 인간 본질인 영혼이 달리 설명되는 추세이다. 몸속에 영혼이 있지 않고 영혼 속에 몸이 있다는 것이다. 여기서 영혼은 과학적 개념인 장(Field)과 호환될 수 있는 바, 영이라 불러도 좋고 ‘온생명’이란 말도 낯설지 않다. 거대한 생명공간으로서의 장(영)안에서 개체는 전체 없이 존재할 수 없고 모든 것은 차별 없이 상호 영향을 주고받는다. 이를 ‘새로운 애니미즘’(New Animism)이라 불러도 좋겠다. 이 때 영, 혹은 장은 다석이 말한 ‘빈탕’ 곧 ‘없음’과 다르지 않다. 그에게 허공이 곧 있음의 근거였던 까닭이다. 텅빈 곳에 영이 가득 차 있다는 것이 다석의 생각이었다. 그것이 유교의 경우 ‘태극이무극(太極而無極)’이었고 불교는 ‘진공묘유(眞空妙有)’로 언표 되었으며 기독교의 하느님을 ‘없이 계신 이’로 부른 이유였다. 이처럼 하느님 영이 줄 곧 우리와 더불어 있었기에 다석은 성령을 받으라는 말을 아주 싫어했다. 한시도 우리를 떠난 적이 없었기에 누가 누구에게 베풀 수혜의 대상이 아니었던 것이다.

사물을 욕망의 대상이 아니라                                                                                   자신과 동일한 영의 산물로 알라

이런 맥락에서 우리는 다석이 성리학의 인식론, 격물(格物)을 盡物性(진물성)이라 달리 표현한 것에 주목한다. 격물은 만물이 동일한 理(이)를 갖고 있다는 전제하에 인간의 理(이)가 사물의 이치와 교감하다가 어느 순간 주객의 일치가 이뤄진다는 성리학의 으뜸 개념이다. 다석은 이를 ‘진물성’으로 재 개념화 시켜 사물과 인간 본성 간 간격이 사라진 하나 된 상태를 더욱 강조했다. 경물에서 보듯 사물을 대상화 시키지 않고 자신의 마음속에서 물성과의 일치를 역설한 것이다. 이점에서 다석은 주희의 理學(이학)이 아닌 왕양명의 心學(심학)과 유사하다.

동학에서 말하는 내 마음이 곧 네(그)마음이라는 ‘吾心卽汝心’(오심즉여심)의 경지라고 말해도 좋다. 사실 동학이 敬天(경천), 敬人(경인)을 넘어 敬物(경물)을 강조한 것도 이런 선상에서였다. 하지만 다석의 ‘진물성’은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갔다. 物(물)을 존경한다는 말 속에서 지행합일의 경지를 살폈다. 예컨대 닭을 마음에 품고 귀하게 생각했다면(경물) 사람은 새벽닭이 그렇듯이 부지런한 닭의 성질까지 닮아야 했던 것이다. 닭처럼 부지런한 존재가 되는 것이 진물성의 과제이자 목표였다. 이런 논의는 결국 ‘덜 없어’ 더러워진 존재, 탐진치에 찌든 인간을 치유, 해방 시킬 목적에서 시작되었다. 없이 계신 하느님처럼 존재하기 위한 길이었다. 예수의 십자가가 땅으로부터 하늘로 솟난 길이었듯이 우리 역시 솟난 존재가 되길 바라서였다. 누구든지 자기 몸을 제물삼아야(자속) 가능한 일이다.

다석의 십자가는 이렇듯 ‘덜 없는’ 인간이 ‘없이 계신 이’와 하나 되는 길을 적시한다. 이것이 단적으로 ‘見物不可生’(견물불가생) 즉 사람 또는 사물을 보고 마음을 일으키지 말라는 언어로 표현되었다. 주지하듯 ‘덜 없는’ 인간은 뭇 사물에 마음을 빼앗기는 견물생심의 존재이다. 그럴수록 사물의 본성을 알고 그와 하나 되면 자기 마음을 지킬 것을 역설했다. 사물을 욕망의 대상이 아니라 자신과 동일한 영의 산물로 알라는 것이다. 이처럼 인간의 존재론적 각성은 자연과의 동근원성을 말하는 지점까지 확장되었다. 앞서도 말했듯이 그것은 몸성히(목숨), 마음놓이(말숨)의 단계를 거쳐 자신의 바탈(얼숨)을 실현시킨 ‘바탈태우’의 경지라 할 것이다. 십자가는 대속의 상징이 아니라 스스로를 태워 자신을 산 제물로 바치라는 명령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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