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의 사상가, 다석(多夕) 유영모의 맥락
밤의 사상가, 다석(多夕) 유영모의 맥락
  • 이정배 (전 감신대 교수, 현장아카데미 원장)
  • 승인 2022.07.06 05:0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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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배 교수의 "내가 이해하는 다석(多夕) 유영모" 연재 (1)

몇 차례에 걸쳐 <성서와 문화>지에 다석 유영모(1890-1981)에 관한 글을 쓰게 되었다. 지면을 허락하신 관계자분들께 감사하며 방대한 다석 사상의 핵심을 간추려 전달코자 노력할 것이다. 

다석 유영모
다석 유영모

이번 첫 글에서는 다석을 ‘다석’ 되게 했던 그의 사상적 배경을 살피고 필자가 다석을 연구하는 이유에 대해서 정리하겠다. 그간 필자는 고 김흥호 선생과 함께 펴낸 <<다석 유영모의 동양사상과 신학(솔, 2002)>>을 비롯하여 <<없이 계신 하느님, 덜 없는 인간(모시는 사람들 2009)>>, <<빈탕한데 맞혀 놀이(동연 2011)>> 그리고 <<귀일신학(밀알북스 2020)>>등을 출판했고 다석학회 회원으로 활동해 왔다. 최근에는 <아주경제>에서 단행본 출판을 목적하여 다석 연구자들 12명을 인터뷰했고 연구 동향을 취재했는데 그 중 한 사람으로 참여했다. 올해 말 이 책이 출판되면 다석 유영모를 조망하는 다양한 시각들을 한눈에 살필 수 있을 것이다.

주지하듯 2008년 세계 철학자 대회가 한국(서울대학교)서 열렸고 여기서 한국을 대표하는 사상가 몇 분이 세계적으로 공식화되었다. 불교의 원효와 지눌, 유교의 퇴계와 율곡 그리고 역사는 짧지만 다석 유영모와 그의 제자 함석헌이 세계가 인정하는 기독교 사상가로 자리매김한 것이다.

하지만 다석 사상은 이 ‘빛을 꺼라’고 명했고 의식을 버릴 것을 요구했다. 빛, 곧 의식 탓에 인간은 더 큰 세계, 있는 그대로의 실상을 볼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유영모의 무엇을 세계 철학계가 인정한 것인지를 물어야겠다. 다석(多夕)이란 말에서 보듯 유영모의 호는 저녁 석(夕)자가 세 개씩이나 겹쳐있다. 한 마디로 많은 저녁이란 뜻이다. 그의 사상이 밝은 대낮보다 어둔 밤을 선호, 중시했음을 적시한다. 이는 밤이 지닌 동양적 에토스 때문이었다. 지금껏 서구 기독교는 어둠을 이기는 빛의 종교로서 빛과 자신을 동일시했다. 악을 이기고 어둠을 극복하는 선을 대변했던 것이다. 이 빛은 곧 의식이기도 했다. 빛으로 만사가 드러나듯 일체를 분별, 판단하여 가치를 드러내는 기준이 바로 의식인 까닭이다. 그렇기에 기독교 서구는 의식을 앞세워 주체(동일)성의 철학을 탄생시켰고 그로써 세계 지배이데올로기를 정초했다.

하지만 다석 사상은 이 ‘빛을 꺼라’고 명했고 의식을 버릴 것을 요구했다. 빛, 곧 의식 탓에 인간은 더 큰 세계, 있는 그대로의 실상을 볼 수 없었기 때문이다. 태양이 사라질 때 비로소 장대한 우주, 서구가 보지 못한 존재의 여여성(如如性)이 드러날 수 있다. 이로부터 동양은 진공묘유(眞空妙有)를 말했고 태극이무극(太極而無極)인 것을 역설해 왔다. 어둠, 곧 ‘텅 빔’ 속에 모든 것이 가득 찼으며 ‘있음이 곧 없음’ 이란 서구에 낯선 논리를 탄생시킨 것이다. 기껏해야 동일률과 모순율에 익숙한 서구로서는 배중률에 근거한 다석의 하느님을 쉽게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여기서 비롯할 기독교에 대한 이해가 서구의 그것과 얼마나 다를지를 후술한 글에서 논할 수 있겠다. 김흥호가 다석 사상을 일컬어 ‘동양적 기독교’라 말했던바 서구 철학계의 평가는 이에 대한 긍정이자 인정이라 할 것이다.

하지만 다석 사상도 하루아침에 생긴 것도 그 혼자만의 창작물도 아닐 것이다. 앞선 이들의 영향사가 있었을 것이고 이를 녹여 자신 것으로 만든 치열한 과정의 산물일 수밖에 없다. 필자는 다석 사상을 전후좌우의 맥락에서 이해한다. 위로는 동학, 풍류, 천부경에 맥이 닿았고 옆으로는 신채호, 내촌, 톨스토이, 간디 등과 소통했고 아래로는 함석헌, 김흥호, 안병무, 박영호 등에게 영향을 주어 소위 ‘다석 학파’ 내지 씨알 학파‘의 길을 열었다고 보기 때문이다.

먼저 다석 사상의 출처부터 서술하겠다. 정작 다석은 동학에 대한 말을 아꼈으나 필자는 양자의 관계성에 주목했다. 다석은 천부경을 오롯한 우리글로 번역할 만큼 이 책을 중시했다. 그 속에 인간을 중심에 둔 삼재사상이 깃들어 있는 까닭이다. ‘인중천지일’(人中天地一), 사람 속에서 하늘과 땅이 하나라는 천부경의 생각은 다석과 동학의 핵심이자 풍류적 인간 이해의 본질에 속한다. 다석이 강조한 귀일(歸一) 개념도 결국 ’인중천지일‘의 뜻에서 찾아야 옳을 것이다. 물론 다석 스스로 이런 생각을 언술한 바 없다. 하지만 그를 연구하는 입장에서 다석 사상은 동학을 기독교적으로 토착화시킨 것이라 볼 수도 있겠다. 최근 도올의 동학 연구가 출판되어 세인의 주목을 받는 상황이다. 동경대전을 주해한 것인데 1. 2권의 각각의 부제가 눈길을 사로잡는다. ‘나는 코리안이다‘와 ’우리는 하느님이다‘가 바로 그것이다.

다석 역시 이 점에서 결코 다르지 않다. 그가 천부경을 중시하는 것은 삼재사상 때문이고 그것이 한글 창제의 원리, 특별히 모음(ㅡ, ㅣ, ㆍ)의 원리가 된 까닭이다. 다석에게 한글은 우리 민족을 하늘로 부르는 하늘의 소리(천문)이었는데 그 근거는 삼재에 대한 뜻풀이에 있다. 세상(ㅡ)을 뚫고 하늘(ㅣ)에 오를 때 고통 하는 소리, 아(ㆍ)를 십자가로 봤다. 인간 누구나가 하늘이고 고통을 통해 다른 세상을 만들 수 있다고 믿었다. 동학의 21자 주문 ‘시천주조화정영세불망만사지侍天主造化定永世不忘萬事知도 이런 선상에서 이해될 수 있다. 하늘을 품은 인간, ’시천주‘의 자각은 ’인중천지일‘의 다른 표현이자 삼재론과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이점에 대해서는 후일 긴 논문을 통해 정교하게 밝힐 생각이다.

다석과 동시대 사람들과의 관계는 지면 관계상 다음으로 미뤄야 할 것 같다. 여기서는 다석 이후, 그의 영향 사 속에서 자기 소리를 내는 아래쪽 사람들, 즉 후학들의 이야기를 먼저 해야 할 것 같다. 이렇듯 필자가 다석으로부터 이후의 영향사를 논하는 것은 선불교 바탕에서 신학을 재구성한 일본 교토학파의 기독교 이해와 견줄 목적에서이다.

다석 이후 전개된 일련의 사상적 발전 속에서 앞서 말했듯이 ’다석 학파‘ 내지 씨알 학파’의 기독교를 충분히 말할 여지가 있다. 일본뿐 아니라 서구와 변별된 토착적 기독교 사상을 여기서 찾을 일이다. 민중 신학도 의당 이 속에 포함될 수 있겠으나 그것으로 ‘다석 학파’의 기독교가 환원될 수는 없을 것 같다. 오히려 그 범주를 훌쩍 뛰어넘는다고 봐야 옳겠다.

동학 시천주의 다석식 표현인 ‘바탈’(성)이 함석헌에게서 역사 속 ‘뜻’으로 해석되었고 김흥호는 그것을 동서를 아우르는 ‘실존’으로 표현했으며 박영호는 ‘얼 나’라는 이름하에 기독교 안팎을 넘나드는 개념으로 확대시킨 까닭이다. 안병무는 이를 씨알 민중이란 계급적 차원에서 이해했다.

이후 여러 신학자들이 이 개념을 부여잡고 나름 신학적 작업을 하고 있는바 이들 각각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연속성 차원에서 학파로 명명해도 좋을 것이다. 가톨릭 성서 신학자 정양모 신부도 이 반열에 서 있고 하이데거 연구자인 이기상 교수 역시 가톨릭을 배경 삼아 다석 언어관을 주목하고 있다.

사실 이 모두는 <<대학>>의 ‘민(民)’ 개념을 ‘씨알’로 풀었던 다석의 본래 해석에 빚진 결과였다. 인간은 누구든지 하늘이 준 바탈을 갖고 태어난 존재로서 그를 씨알로 명명했다. 물론 이들 간에도 상호 차이점은 충분히 존재할 수 있다. 역사와 개인, 기독교와 이웃 종교, 동양과 서구, 개신교와 가톨릭, 각기 어디에 방점을 두는 가에 따라 다석을 이해하는 차원이 달라질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본질적인 차이라기보다 학파 안에서의 발전적 동향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겠다.

향후 다석 학파의 기독교는 이런 지향성 하에서 더욱 확장될 필요가 있다. 필자가 <<귀일신학>>을 펴내면서 펜데믹 이후 시대를 위한 다석 사상이라 이름한 것도 민중 신학을 넘어 향후 영성 및 생태 신학을 위한 무궁무진한 가능성이 잠재되었다고 봤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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