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석 유영모의 귀일(歸一)사상
다석 유영모의 귀일(歸一)사상
  • 이정배
  • 승인 2022.11.25 15: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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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배 교수의 "내가 이해하는 다석(10): 다석과 귀일사상

다석 사상의 핵심이자 결론은 귀일(歸一) 속에 있다. 귀일, 그 말은 하나에로 돌아간다는 뜻이다. 그 ‘하나’가 뭔지를 묻고 찾고자 지금껏 여러 말을 해왔다. 여기서 귀일은 통일과 많이 다르다. 상호 다른 것을 원만하게 조정하는 것이 통일이다. 이 과정에서 타협과 대충, 속임이 없을 수 없다. 하지만 귀일은 근원으로 돌아가는 것으로 ‘온통 하나’가 되는 길이다. 근원으로 돌아갈 때 남북도 하나 될 수 있다고 믿었다. 현상적으로 다양한 종교들 역시 귀일할 수 있다고 확신했다. 서구 종교다원주의와 다석 사상이 같을 수 없는 이유이다. 제종교가 하나인 것 이상으로 세상 전체가 정의로울 수 있다고도 확신했다. 마지막 글인 본고에서 다석이 정치적 이념과 종교들을 어떻게 하나로 엮었는지를 서술할 것이다. 필자의 책 <<귀일신학(신앙과 지성사 2021)>>이 도움이 될 수 있겠다.

다석은 유교에서 말하는 대동정의(大同正義)를 ‘온통 하나’란 말로 풀었다. 대동은 크게 같아진다는 뜻으로 어떤 ‘-ism’으로 환원될 수 없다. 세상은 이런 큰 하나를 모르기에 편 나눠 싸울 뿐이다. 인간 속에 이런 ‘하나’로부터 온 소중한 것이 내재한다. 이 하나로부터 수백 수천가지가 비롯할 수 있는 것이다. 그렇기에 인간은 누구나 ‘큰 하나’를 간직한 자신 속 깊은 곳을 굳게 믿고 이를 위해 자신을 거듭 비워야 옳다. 즉 전체를 품은 하나가 내주한 곳이 바로 자신의 ‘속알’(본성)이기에 이는 비울수록 커진다. 마치 모든 것을 채우는 허공, 곧 진공모유(眞空妙有)의 우주처럼 말이다. 다석은 이를 ‘속곧이 믿븨’란 말로 표현했다. 자기 속의 하나를 깨쳐서 그를 싹 티워 지속해서 성장시키는 일을 적시한 것이다. 인중천지일로서의 인간 자신을 자각하는 것이 바로 믿음이다.

주지하듯 대동의 ‘大’를 둘로 나누면 사람 ‘人’자가 두 개 생긴다. ‘同’을 쪼개면 ‘司(판단)’가 되고 ‘正’은 ‘下’와 ‘止’로, ‘義’는 ‘羊’과 我‘로 파자된다. 이를 종합하면 의견 분분한 사람들이지만 옳은 판단을 위해 하늘로부터 내려온 판단을 받아 양처럼 묵묵히 그 뜻을 따라야 한다는 말뜻이다. 온통 하나가 된 세상은 이렇게 이뤄진다. 이를 위한 방편이 경신중정(敬愼重正)이다. 언제든 요지부동한 마음을 갖고 ’하나‘에 집중하라는 의미다. 생각과 삶이 나뉠지라도 다른 것 속에 늘 상 같음이 있어 ’큰 하나‘에 이를 수 있다는 것이다. 이를 일컬어 다석은 ’신종추원‘(愼終追遠). 큰 하나로 돌아가는 것(귀일)이라 불렀다. 온통 하나인 것이 내주했기에 차이가 있지만 서로 닮을 수 있고 그 하나 탓에 모두 옳게 된다는 것이다. 이것을 제사, 곧 예배의 본질로 여겼다. 결국 귀일 사상은 허공(빈탕)과 마음이 하나라는 생각에서 비롯한 것이다. 절대는 본래 나를 떠나서는 존재치 않기 때문이다. 이 하나를 온전히 감(感)하여 지(知)하는 일이 사람이 되는 길이자 사는 이유겠다. 인간이 이런 절대(온통 하나)의 아들로 느껴질 때 누구나가 독생자가 된다. 그렇기에 다석은 예수나 나나 모두 독생자인 것을 강조했다. 다석의 멋진 말을 소개한다. “허공이 공간을 만들고 이 공간에 뜻을 명령하는 것은 시간이다”시자명야(時者名也). 절대 하나를 느낀 바로 그 순간을 일컬어 시간이라 한 것이다. 빈탕(절대 하나)의 활동이 자기 것이 되는 때(시간제단)가 자기 몸을 산 제물로 바치는 예배의 자리(공간)이기도 하다. 이렇듯 하나(빈탕)에 맞혀 살면 우리 마음을 빼앗길 여지가 없다. 신앙(믿음)은 자신 속에서 큰 하나를 찾아 그에 자신을 맞추는 일이다. 이것은 동학에서 말하는 시천(侍天), 양천(養天), 체천(體天)과도 다르지 않다. 하지만 사람들은 나누고 쪼개진 세상만 알뿐 온통 하나인 그를 외려 배척한다. 그럴수록 다석은 귀일로서만 정의로운 대동세계에 이를 수 있다고 했다. 같은 맥락에서 다석은 현상적으로 달라 보이는 종교들 간의 회통을 강변할 수 있었다.

동양적 기독교, 비케리그마적 기독교, 비정통적기독교라 불렸던

다석 신학은 아시아적 ’大孝기독교(론)‘라 불려도 좋겠다

부언하지만 개체는 그에 앞서 존재했던 전체에서 나왔기에 그에게로 돌아간다는 것이 귀일 사상의 핵심이다. 유교의 추원보본(追遠報本)에서 유래한 것으로서 귀일 사상은 전체와 개체의 관계를 중시했다. 전체로서의 하나는 비록 알 수없는 것이나(不測) 그곳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는 것이 인생이다. 이것은 작은 것이 큰 것 속에 흡수 통합되는 러시아 인형 같은 통섭(統攝)이 아니라 마치 소금물처럼 형체를 없이하며 맛을 내는 통섭(通涉)의 방식으로 그렇다. 따라서 기독교를 변증한 종래의 서구적 논리들- 천주교의 존재유비나 개신교의 신앙유비- 과는 전혀 달랐다. 불측의 존재인 큰 하나(빈탕)가 만물 속에 천지인 셋으로 머물며 그들로 하여금 자신을 온전히 품게 했던 까닭이다. 이 셋은 오로지 사람 속에서 만날 수 있다. 이 셋의 귀일처가 바로 밑둥(바탈)인 것이다. 이런 하나를 찾아 그와 일치되려는 것이 종교들의 할 일이자 본질이다.

비록 존심/양성(유교), 돈오/점수(불교), 칭의/성화(기독교), 시천/양천(동학) 등 개념적 구별은 있지만 궁극적으로 온통 하나와 일치한 삶을 목적하기에 이들 간 소통은 항시 가능하다. 다석은 이런 삶을 일컬어 대효(大孝)라 칭했다. 그에게 예수는 제 뜻 버려 하늘 뜻 구한 대효의 존재였고 우리에게 그 길로 나설 것을 청하는 존재였다. 석가와 공자 역시 이점에서 차이가 없다. 단지 다석은 예수를 통해 대효의 길을 가려고 했을 뿐이다. 이런 연유로 다음과 같은 등식이 가능하다. 지면 여유가 없어 구조만 밝혀 보겠다. 앞서 말한 계소리/예소리/제소리를 기준하여 이에 상응하는 종교개념은 다음과 같다. 하느님/예수(십자가)/성령(기독교), 견성/고행/성불(불교), 천명지위성(天命之謂性)/솔성지위도(率性之謂道)/수로지위교(修道之謂敎,유교), 시천주(侍天主)/양천주(養天主)/체천주(體天主, 동학). 말했듯이 이들 개념들 모두는 큰 하나(빈탕)와 일치하기 위해 자기 속 깊은 곳을 곧게 믿고 자신을 비우는 과정을 설명하고 있다. 앞서 말했듯이 ’속곧이 믿븨‘의 삶을 명시한 것이다. 이점에서 그간 동양적 기독교, 비케리그마적 기독교, 비정통적기독교라 불렸던 다석 신학은 아시아적 ’大孝기독교(론)‘라 불려도 좋겠다. 다석의 귀일사상은 한마디로 大孝의 종교성을 견인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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