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없이 계신 하느님”, 비(非)케리크마의 신
“없이 계신 하느님”, 비(非)케리크마의 신
  • 이정배 교수
  • 승인 2022.08.19 03:5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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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배 교수의 "내가 이해하는 다석(多夕) 유영모" 연재 (4): 다석의 신론

이번 글에서는 다석의 하느님 이해, 곧 그의 신관을 살펴보겠다. 앞서도 언급했듯이 다석은 '있음'보다 '없음'을, 빛보다는 어둠을 우선시했다. 많은 저녁(밤)을 뜻하는 다석이란 이름 속에 이런 의미가 담겼다. 이는 서구 기독교나 그쪽 철학 사상과 견줄 때 대단히 낯설다. 하지만 다석은 이를 대립적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없이 있는 하느님’이란 말이 적시하듯 없음과 있음은 결코 양자택일적이지 않다. ‘없음이 곧 있음'이고 ‘빛이 곧 어둠’이란 것은 서구 논리들, 동일률이나 배중률로는 납득할 수 없을 것이다.

이를 적시하는 다석의 예를 소개한다. 사람들은 나뭇가지에 핀 꽃을 보며 좋아하나 정작 나무와 꽃을 가능케 하는 허공을 보지 못하다는 것이다. 허공 없이는 나무도 꽃도 존재할 수 없다. 허공(무)이 우선이나 나무나 꽃과 둘일 수 없다(不二불이)는 것이 다석의 생각이다. 이 점에서 다석의 신론은 ’무위적 유위‘를 말하는 노자의 도,현상과 실재의 궁극적 일치(“산은 산이고 물은 물이다”)를 말하는 불교적 공(sunjata) 사상과도 회통할 수 있다.

하지만 다석의 하느님 이해가 이들 사상과 변별되는 지점 또한 없지 않다. 신적 초월성과 인간의 의지가 이들에 비해 강조된 까닭이다. 초월성은 대종교의 경전이 된 <<천부경>>의 영향이겠고, 인간 의지는 유교적 토양에서 비롯한 것이다. 이를 통섭하여 다석은 십자가에서 정점을 이룬 예수를 설명했다. 인습적 기독교를 떠났지만 예수 없이 기독교의 독특성을 말할 수 없었던 까닭이다. 대속적 죽음으로 예수를 의미화하는 기성 신학과 어떻게 다른지는 다음 호에서 설명할 것이다.

얼마 전 <<없이 계신 하느님- 절대자에 대해 동양적으로 사유하기>>란 책이 동연에서 출판되었다. 성공회 윤정현 신부가 영국 버밍햄 대학에서 썼던 다석 관련 최초의 박사 논문이다. 2003년에 제출한 논문을 거의 20년 만에 한국어로 재탄생된 것이다. 앞서 말했던 필자의 견해를 뒷받침하는 좋은 자료라 생각하며 일독하면 좋을 책이다. 서구인들에게 하느님을 논하는 다른(동양) 논리가 있음을 밝혔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책은 다석 신론의 논리적 전거를 밝히는 일에 주력했다. 따라서 본고에서는 한정된 지면을 통해 다석 신론의 속성과 의미 등에 초점을 두고 살필 것이다. 다시 후술하겠으나 다석이 즐겨 사용하는 ‘귀일’(歸一)이라는 말뜻도 소개하겠다.

하느님은 항시 인간 속에 있다. 태초부터 하느님은 인간을 떠나 본 적이 없다는 것이 다석의 확신이었다.

없이 있는 하느님, 도대체 이 말뜻은 무엇인가? 초월성을 인정하면서도 없음을 강조하고 실체를 부정하면서도 ‘있음'을 말하는 다석의 신관은 서구 기독교적 사유, 교리체계에 안주한 사람들에게는 많이 낯설고 난해할 것이다. 다석 신관의 구조와 의미는 <천부경>의 한 구절 ‘인중천지일’ (人中天地一), ‘사람 속에서 하늘과 땅이 하나로 존재한다’는 말 속에 모두 담겼다. 높이 계신 하느님이 육신을 지닌 인간 속에 내주한다는 것이다. 모든 인간은 존재 자체가 초월의 내주라는 뜻이다.

가톨릭 신학자 이반 일리치의 말대로 초월을 초월한 것이 땅 중의 땅인 ‘인간’이란 사실이다. 이 점에서 인간은 누구나 독생자가 될 수 있다. 다음 호 주제지만 예수만이 초월적 육화일 수 없다고 봤다. 인간은 누구나 하늘(초월)을 ‘받’아 몸속에 모신 존재들이다. 인간은 누구나- 다석이 즐겨 쓰는 용어로- '바탈'을 갖고 태어났기 때문이다. 바탈은 ‘받 할’, 즉 위로부터 ‘받’아 ‘할’ 것을 갖고 있다는 의미다. ‘받 할’을 자음 접변하여 읽으면 '바탈'이 된다.

이 '바탈'은 유교의 경우 본연지성이겠고 불교에는 불성일 것이며 동학은 인내천으로 그리고 기독교의 경우 ’독생자‘로 언표될 수 있다. 이는 모두 머리를 하늘로 두고 살아야 할 인간의 공통된 모습들이다. 인간에게 얼굴이 중요한 이유도 여기서 찾을 수 있다. 얼굴은 내면의 '바탈'이 드러나는 얼의 골짜기인 까닭이다. 따라서 하늘이 인간 속에 있다는 것이 바로 ‘없이 있는’ 하느님의 실상이다. 하느님은 항시 인간 속에 있다. 태초부터 하느님은 인간을 떠나 본 적이 없다는 것이 다석의 확신이었다. 이때 바탈은 얼이자 성령이라 말 할 수 있다. 봐도 보이지 않는 비실체적 존재인 까닭이다. 초월의 내주로서 이것은 본디 초월성을 인정치 않는 불교나 노장사상과는 조금 달랐다. 이들 종교들은 세상 ‘밖’을 인정치 않았으나(0도=360도의 세계관) 다석은 ‘밖’을 중시했으니 말이다. 물론 ’밖’을 실체로 여겼던 기독교를 비판하는 방식으로 말이다.

이로써 다석은 모든 종교가 저마다의 '바탈'의 실현을 통해 온통 하나가 되길 바랐다. 종교가 하나 되는 것을 통해 세상 전체가 바르게 될 것을 희망한 것이다. 이것이 바로 귀일사상(신학)의 핵심이자 골자였다. 한마디로 인간 마음이 곧 빈탕이신(없이 계신) 하느님과 같음을 알라는 것이다. ‘빈탕한데 맞혀 노는 일’이 세상에 태어난 인간의 할 일이 되었다. 이것이 기독교가 말해왔던 신적 보편성의 실상이다. 여성 신학자 이은선의 말을 빌리자면 성’(聖)의 평범성’일 것이다.

이런 보편성에 이르려면 인간은 거듭 자신의 탐진치를 축소시켜내야 한다. 이는 자신의 마음이 하느님과 둘이 아닌 것을 알 때 가능하다. 자신의 삶도 하느님 존재가 그렇듯이 없이 있듯이- 빈탕한데 맞혀서- 살라는 것이다. 하지만 현실 인간은 덜 없는 존재가 되어 버렸다. 하느님처럼 없이 있지 못하며 늘상 덜 없는 상태로 살고 있을 뿐이다. 바탈이 하늘인 것을 잊었기에, 둘 사이에 분리가 발생한 탓에 없음은 실종되고 견물생심을 일으키는 '있음'의 세계에 미혹된 탓이다. 따라서 ’덜‘ 없기에 더럽게 된 것이 인간의 실상, 곧 죄(인)라 할 것이다. 그럴수록 덜 없는 인간을 없이 계신 하느님으로 이끄는 것이 종교가 할 일이다.

이런 점에서 다석은 ‘목숨’, ‘말 숨’ 그리고 ‘얼 숨’을 순차적으로 구별하며 강조했다. 탐진치에 속한 인간이 목숨, 곧 육체의 숨을 쉬는 반면에 이를 벗고자 애쓰는 존재를 일컬어 '말 숨’을 쉰다고 했다. 종교들의 가르침이 곧 ‘말 숨’인 셈이다. 그러나 앞서 말한 귀일, 온통 하나가 되는 길은 ‘얼 숨’에 달렸다는 것이 다석의 지론이다. 세상이 온통 하나가 되는 길이 바로 여기에 있다. 하늘과 땅이 인간 속에서 하나가 된 상태라 할 것이다. 이 점에서 뭇 종교는 자신들 가르침을 절대화시키는 누로부터 해방되어야 마땅하다. 하느님은 모든 것을 회통시켜 하나에로 이끄는 ‘영(성령)’인 까닭이다. 이 주제는 인간론과 귀일사상을 논하는 지면에서 재차 다룰 것인바 여기서 더 이상 진척시키지 않겠다.

주지하듯 서구 신학은 그간 ‘비신화화’(불트만), ‘비종교화’(본회퍼), 그리고 ‘비케리그마화’(부리)라는 신학적 방법론을 통해 기성 기독교의 틀을 바꾸고자 노력했다. 비신화화가 서구 전통 내에서 메시지의 시간적 차이를 극복한 경우라면 비종교화는 기독교 메시지를 윤리적 차원으로 확대시킨 차원일 것이다. 이에 반해 비케리그마화는 기독교 메시지가 공간 차에 따라 달리 의미화 될 수 있다는 신학적 견해다.

다석의 없이 계신 하느님은 이 점에서 비케리그마화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말할 수 있다. 다음 장에서 논할 예수에 대한 이해 역시 신앙의 그리스도와도 다르고 역사적 예수상과도 크게 변별된 모습을 보여줄 것이다. 각각의 공간적 풍토에 따라 케리그마가 달리 표현될 수 있다는 비케리그마화가 다석 사상을 이해함에 있어 그 신학적 배경이 될 수 있겠다 싶어 글 말미에 사족처럼 덧붙였다. 다음 장에서 우리는 ‘없이 계신’ 하느님의 시각에서 새롭게 이해된 다석의 예수상을 살펴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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