없이 있음의 존재론과 생태학
없이 있음의 존재론과 생태학
  • 이정배 교수
  • 승인 2022.10.04 05:2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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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배 교수의 "내가 이해하는 다석(7): 기후붕괴 시대의 다석 사상

지난 장에서 우리는 견물생심에 반하는 ‘見物不可生’(견물불가생), 물건을 보고도 마음을 일으키지 않는 상태를 논했다. 욕망을 부추기는 자본주의 현실과 맞서는 주체적 인간태도를 다석의 말로 표현한 것이다. 주지하듯 홀로세 말기의 지구생태계가 자본주의 폐해로 기후붕괴시대에 접어들었다. 물건에 마음이 홀려 인류가 욕망 덩어리로 살 경우 2050년 거주 불가능한 지구가 될 것이란 경고가 끊이질 않고 있다. 자연의 질적 파괴가 임계점을 넘어선 탓이다.

이런 난제를 해결키 위해 기독교 내부에서 여러 형태의 생태신학이 등장했다. 우주적 그리스도론이 등장했고 신론의 모형변이, 곧 어머니 하느님 이란 말도 회자되었다. 기독교내부의 뿌리은유-하느님, 그리스도 등-들을 생태학적으로 재해석하여 자연과 관계하는 인간의 태도를 바꿀 목적에서였다. 일리가 없지 않으나 이들 경우는 여전히 ‘있음’의 표상에서 자유롭지 않다. 전 인류의 생태적 회심을 위해 다석이 말했던 ‘없음’의 존재론적 차원을 각인시키는 것이 필요할 듯싶다. 없이 있는 하느님을 닮은 ‘없이 있는 인간’이 될 때 자연 역시 회복될 수 있을 것이다. 쉽게 달리 말하자면 인간위주의 도구적 관점을 벗고 있는 그대로의 존재론적 관점을 회복하자는 것이다. 이점에서 ‘없이 있는 하느님’은 생태학적 회심의 전거라 말할 수 있겠다.

  다석 신론의 요체인 ‘없이 있음’이란 말은 서구 주류 담론 어느 것으로도 해명될 수 없었다. ‘없음’을 모든 것을 있게 하는 초월적 근거이자 전체로 봤던 까닭이다. 더욱이 이것이 인간 속에 바탈- 받아서 할 것-로서 주어져 있다고 생각했다. 그렇기에 인간 역시 하느님처럼 없이 있어야 할 존재가 된 것이다. 빈탕의 자녀인 인간은 자연을 욕망 대상이 아니라 존재론적으로 성찰해야 옳다. <다석 일지> 곳곳에 누차 언급 되었던 바, 그에게 있는 그대로의 자연은 ‘旣成佛’(기성불)이었다. 우주만물을 신의 현현으로 생각했던 것이다. 하느님 속성을 우주 만물 속에서 찾았다는 말을 누차 남겼다. 반면 인간은 아직 부처가 되지 못한 未成佛(미성불)상태로 있다. 자신을 없이 있는 존재로 깨치지 못했기 때문이다. 욕망을 지닌 몸으로서의 존재, 탐진치의 삶을 벗겨내지 못한 탓이다. 이런 현실에서 생태적 위기극복은 緣木求魚(연목구어)이고 생태적 회심은 言語道斷(언어도단)일 수밖에 없다. 

그럴수록 다석은 성령이란 말로 ‘없이 계신 하느님’과 인간의 ‘바탈’을 상호 소통시키고자 했다. 우주를 지속시키는 ‘하나’이자 자기 속의 ‘바탈’로서의 영을 우주 만물 속에서 봤던 것이다. 그렇기에 자연 속에 깃든 영을 찾는 것 역시 인간의 할 일로 여겼다. 지난 장에서 언급한 ‘盡物性’(진물성)이란 말이 바로 이를 적시한다. 이는 사물(자연)의 본성과 인간이 온전히 하나가 되는 상태를 일컫는 바, 몸나(개체존재)의 극복을 전제한다. 절대생명인 ‘하나’와의 일치를 위해 자신의 바탈을 태울 때(바탈태우) 가능하다. 목숨만이 아니라 말(얼) 숨을 쉬는 존재가 되라는 것이다. 이를 일컬어 다석은 인간이 져야할 십자가라 했으며 이로써 누구든 그리스도가 될 수 있음을 가르쳤다. 자신의 바탈을 태우는 것을 십자가로 본 것이다.

다석은 예수 십자가를 ‘一坐食 一言仁’(일좌식일언인)이란 말로 다시 풀었다. 예수가 십자가에서 ‘제 뜻 버려 하늘 뜻 구했듯이’ 자기 몸을 하느님께 제물로 바치란 말뜻이다. 십자가와 부활이 다석에게서 ‘몸 줄여 마음 늘리는 일’로 재구성된 결과였다. “쌀 한 알을 심어 천 알, 만 알 수학하는 것도 이득이지만 斷食(色)으로 자신을 하느님께 바쳐 하느님 아들(그리스도)로 변하는 이득이 더 크다”는 그의 말도 이런 배경에서 이해할 수 있다. 몸나가 이웃과 자연을 해치는 탐욕스런 자아이듯 말 숨 쉬는 참(얼)나는 우주만물과 하나 된 존재를 적시한다.

다석은 우주만물과 조화롭게 사는 것을 ‘禮’(예)라 했고 그것을 ‘알맞음’(中庸)이라 부르기도 했다. 그렇기에 참 나는 생태적 자아, 곧 생태적 회심을 이룬 존재라 말해도 좋겠다. 이런 차원에서 다석은 대속교리를 다음처럼 생태적으로 풀어냈다. “내가 먹는 낱알과 체소가 나의 생명을 위해 희생되어 힘을 내게 대속합니다.” “그리스도가 내 양식이라면 나를 위해 대속되는 만물은 죄다 그리스도입니다.” 등. 그렇기에 앞서 말한 ‘盡物性’(진물성)은 우주만물을 성례전적 대속 제물로 이해하기위한 전거였다. 대속하는 물질(자연)의 본성을 옳게 알아야 인간 역시 변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예컨대 닭고기를 먹으면 닭처럼 일찍 깨어 기도하고 일하는 존재가 되어야 한다고 가르쳤다. 그렇게 사는 것이 그들 생명에 대한 보답이라 여긴 것이다. 한마디로 맛으로, 욕망으로 먹지 말고 뜻으로 살자는 것이다. ‘일좌식, 일언인’이 바로 이를 적시한다. 이를 ‘단식’과 ‘단색’으로 줄여 말해도 좋다. 

 一食(일식), 혹은 단식은 見物生心(견물생심)의 욕망으로부터 벗어나는 일이다. 남의 생명을 탐하지 말고 자기 살을 먹고 자기 피를 마시라는 것이다. 남의 생명 소중함을 깨달아 자기 생명을 제물로 바치는 행위였다. 見物不可生(견물불가생), 사물을 보고 마음을 일으키지 말라는 것이다. 자신을 제물로 삼는 일식은 일종의 ’자기 비움‘으로서 인간을 생태적으로 재 주체화시킬 수 있다. 기후붕괴를 여실히 경험 중인 21세기의 화두가 평등도 자유도 아닌 단순성(Simplicity), 곧 최소한의 물질로 사는 일인 것도 일식의 뜻과 무관치 않다.

性(성)의 문제 역시 생태적으로 중요하다. 인류 존속을 위해 필요하겠으나 절제 없어 몸을 망치는 일들로 세상이 시끄럽다. 생존을 위해 살생하고 교미하는 동물과 인간이 같을 수 없다. 자연이 무너지듯 자기 몸을 해하는 욕망은 인간이 失性(실성)했다는 반증이다. 그럴수록 다석은 ’夫婦有別‘(부부유별)을 강조했다. 다석의 , 解婚(해혼)즉 부부로 살되 남녀로 사는 관계를 끊었던 것도 이런 이유에서였다. 성에 있어서도 금욕이 필요한 시대가 된 까닭이다. OECD 국가 중에서 포르노 문화가 가장 센 나라가 한국이란 사실이 많이 부끄럽다. 몸이 건강해야 마음이 놓이고 자신의 바탈을 불사를 수 있다. 앞전에서 말한 꽁문이와 꼭대기란 말을 다시 기억하면 좋겠다. 다석은 남녀문제를 해결한 존재를 일컬어 ’마음 씻어난 이‘라 불렀다. 

  결국  일식과 단색은 없이 있는 하느님과 하나 되려는 인간의 수행이다. 빈탕한데 맞혀 놀아야 할 종교적 삶의 본질인 셈이다. 다석은 이를 自贖(자속)의 길이라 했다. 빈탕의 큰 하나를 모르면 탐진치의 지배를 벗을 길이 없다. 탕자처럼 매순간 몸나가 작동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다석은 거듭 강조한다. “꽃을 볼 때 온통 테두리 안의 꽃만 보지 꽃을 둘러싼 허공, 곧 빈탕을 보지 않습니다. 허공만이 참입니다.” 꽃을 꽃 되게 하는 것이 빈탕인 한 이것은 소유대상일 수 없다. 꽃만 볼 때 그것은 꺾고 싶고 갖고 싶은 물질일 수밖에 없다. 이것이 서구 생태학적 위기의 본질이다.

빈탕을 알아야 맛이 아닌 뜻을 따라 살 수 있다. 있음이 아니라 없음에 걸맞게 살자는 것이다. 덜 없어 더러운 인간 삶을 끝내야 인류에게 미래가 열릴 수 있다. 없음에 근거한 생태학적 회심 이것이 자신과 인류 나아가 우주를 구하는 길일 것이다. 기후붕괴 시대에 인간에게 절실한 것은 에코지능이다. 이는 자연 따라 사는 능력(Biomimicry)이러 불러도 좋다. 윤리적 소비란 말도 이로부터 비롯할 수 있다. 자연의 한계를 극복 대상이 아니라 적응대상으로 성찰하는 것이 옳다. 다석이 ’진물성‘ 개념을 내세워 견물불가생의 삶을 강조한 것도 이런 이유에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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