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사의 아들 고흐와 사회주의자의 손자 고갱
목사의 아들 고흐와 사회주의자의 손자 고갱
  • 김기대
  • 승인 2023.09.09 03: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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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회자 자녀 열전) 고흐는 왜 귀를 잘랐나

#고흐는 왜 귀를 잘랐나.   

빈센트 고흐와 고갱은 프랑스 남부 아를르에서 2개월을 ‘노란 집’에서 함께 거주했다. 고갱은 화가로서 이름을 어느 정도 알린 상태였고 고흐는 무명에 가까운 신예 화가였다. 둘은 어떤 이유에서인지 말다툼을 벌인 결별한다. 헤어진지 얼마되지 않은 1888 12 23 고흐는 면도칼을 들고 왼쪽 귀를 잘라냈다.

음주로 인한 광기, 고갱과의 결별, 동생 테오의 결혼 소식을 듣고 뒤에 찾아온 감정들(자꾸 결혼식의 종소리가 들려 귀를 잘라버렸다는 가설)이라고 미술사가들은 이야기하지만 이것은 신앙의 갈등을 이겨내지 못한 데서 고흐의 충동적 행위였다.

대대로 네델란드 목사를 배출한 가정에서 태어난 고흐에게는 목사의 길이 예정되어 있었다. 집안 어른들의 설교를 들으면서 오히려 신학의 필요성을 받아들이지 못했다. 그가 이해하는 신앙은 신학연구에서 것이 아니라 실천에 바탕을 두어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고흐 집안은 개혁주의 목사를 배출했지만 개혁교회의 원조인 칼뱅과 달리 구원을 이루는데 인간의 노력도 일정부분 영향을 미친다는 아르미니안주의(Arminianism) 따르는 그로닝엔(Groningen)파에 속해 있었다. 그러기에 고흐에게는인간의 노력’, 실천이 깊게 각인되었다. 정규신학교는 커녕 성서학교 예비반 같은 곳에 다니다가 그마저도 정규과정 입학이 거부되자 벨기에 보르나쥬 탄광촌에 평신도 설교자로 부임한다. 그곳에서도 오래 견디지 못하고 무명 화가의 길에 들어 선다. 가톨릭세가 강한 벨기에 지역에서 개신교식 설교를 듣는 청중들도 불편하기는 마찬가지 였을 것이다.

교회에서 조차 버림받았다고 생각한 그는 끊임없이 하늘의 소리를 갈망했다. 외로움이 내면에 사무치면면서 고흐는 무려 36편의 자화상을 남겼다. 그는 키에르케고르의하나님과 마주하는 단독자개념을 생각하면서 자화상을 그렸을 가능성도 있다. 하지만 고흐는외로움단독자 승화시키지는 못했다.

고흐의 노란 집, 1888년, 반고흐 미술관 소장. 이 집에서 고갱과 2개월을 지냈다.
고흐의 노란 집, 1888년, 반고흐 미술관 소장. 이 집에서 고갱과 2개월을 지냈다.

 

그러다가 고갱을 만났다. 고갱의 외할머니는 페미니스트 용어를 처음 사람으로 알려져 있고런던산책(1840 출간)’ 저자이기도 플로라 트리스탕이다. ‘만국의 노동자여, 단결하라 !’ 구호는 마르크스와 엥겔스의공산당 선언 끝맺는 말이지만 이미 트리스탕이 사용했던 말이다. 사회주의 운동을 하던 트리스탕은 1844 이른 나이에 세상을 떠난다. 프리드리히 엥겔스의 유명한 <영국 노동 계급의 상태> 나온 그로부터 1845년이었다.

노벨문학상 수상자인 페루 작가 마리오 바르가스 요사의천국은 다른 곳에’(김현철 옮김,새물결) 고갱을 다룬 소설인데 여기 따르면 트리스탕은 초기 공상적 사회주의자인 샤를 푸리에와 교분을 나눌 정도로 초기 사회주의에 깊게 개입해 있었다. 페루 출신의 작가가 고갱을? 고갱에게는 페루의 피가 흐르고 있었다(트리스탕의 아버지, 고갱의 외증조부가 페루 사람이다).

좌파 명문가에 속한 고갱(1848년생) 일면식도 없는 외할머니를 존경한다고 말하고 다녔지만 자신이 사회주의적 유토피아를 꿈꿀만큼 이념적 인간은 아니었다. 그에게는 여인과 과일이 있고 풍경이 수려한 타이티가 좋았다. 그래서 바르가스 요사는 타이티를 낯선 천국이라고 부른 것이다.

고갱의 인간 비극,1888년, 샤를로텐룬트 미술관 소장
고갱의 인간 비극,1888년, 샤를로텐룬트 미술관 소장

 

 

다시 고흐로

고흐는 1881 겨울 동생 테오에게 아래와 같은 편지를 쓴다.

무언가 변화를 주기 위해서라도 여자와 함께 있었으면 좋겠다. 나는 사랑없이는, 사랑하는 여자 없이는 수가 없는 사람이다. 다른 누가 아니라 오직 그녀만을 원한다고 해놓고 이제 와서 다른 여자에게 가고 싶어하는 비이성적이고 비논리적이지 않느냐고 혼자 따져보기도 한다.

때는 고흐의 번째 여인이었던 코르넬리아 아드리아나와 헤어진 뒤였다. 7 연상의 여인은 남편과 사별한 8살짜리 아들을 상태였다. 그녀 앞에서 사랑을 고백하기 위해 손에 자해 화상을 입히는 일까지 벌였지만 거절당한 상태였다. 그후로도 고흐에게는 창녀거나 대부분 연상이었다. 성모 마리아(연상이라는 점에서) 막달라 마리아를 사랑하며 예수에 빙의하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고갱은 달랐다. 그의 사랑은 경쾌했고 창녀와 어울리면서 그들은막달라 마리아 투사하지 않았다. 사랑이 너무 가벼웠을까? 고흐보다는 오래 살았지만 고갱의 사인 하나는 매독이었다.

그렇다. 고흐는 고갱이 들려주는 다채로운 여행과 여성에 대한 무용담을 들으면서 새로운 세계에 눈을 떴다. 고흐는 고갱에 비해 초라했던 자신의 삶을 돌아보면서 후회하는 기록을 남기기도 했다.” (이택광, 고흐와 고갱의 유토피아).

고흐는 개혁교회적인 유토피아를 생각했다면 사회주의자의 피가 흐르는 고갱은 유토피아를 꿈꾸기 보다는 인간성 비극이라는 현실을 직시했다. 신의 목소리를 갈망하던  고흐는 방향을 바꿔 자신에게서 진리를 발견하려고 일본의 선불교(禪佛敎) 화풍(畫風) 몰두하기도 했다. 고갱은 신의 소리를 듣는 수동적인 신앙보다는 신과 싸우는 이미지를 좋아했다. '설교 후의 환상'이라는 그림을 통하여 천사와 씨름하는 야곱을 그렸다. 

설교 후의 환상, 1888년, 스코틀랜드 국립미술관 소장
설교 후의 환상, 1888년, 스코틀랜드 국립미술관 소장

 

이처럼 두 사람은 바라보는 지점이 달랐지만 고갱에게 묘한 열등감 있던 고흐는 새로운 유토피아를 찾고자 고갱 아를르로 불러 들였다. 2개월 동안 함께 생활해보니 고갱의 말도 허사(虛辭)이기는 마찬가지였다. 들을 말을 찾지 못한 고흐의 짜증이 심해지자 고갱은 아를르를 떠났다. 그리고 고흐는 귀를 잘랐다.

어린 아이들이 사람 얼굴을 그릴 귀를 그리지 않으면 외부의 소리(어른들의 잔소리 같은) 듣기 싫어하는 심리의 표출이라고 분석한다. 일부 미술 심리학자들은 이런 분석을 수준 낮은 분석이라고 폄하한다. 하지만 고흐는 고갱에게 한없는 자괴감을 느끼던 차에 오래 전 기억을 떠올려보니 프로이트에게 받은 심리상담에서 이린 분석의 소리를 들은 것 같기도 했다.  마침 책상 위에 놓은 면도칼이 보였다. 이듬해 고흐는 세상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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