확신의 실수
확신의 실수
  • 최병인 편집장
  • 승인 2023.05.17 0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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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 하나님이 들의 모든 짐승과 공중의 모든 새를 흙으로 빚어서 만드시고, 그 사람에게로 이끌고 오셔서, 그 사람이 그것들을 무엇이라고 하는지를 보셨다. 그 사람이 살아 있는 동물 하나하나를 이르는 것이 그대로 동물들의 이름이 되었다”(창 2:19).

아주 작은 개미 한 마리가 책상 위에 올라와 나의 공책을 횡단한다. 장난 삼아 볼펜 잉크로 곡선을 그린다. 마치 경사면을 달리듯 개미의 걸음이 휘어진다. 시작점과 끝점이 만나면서 구체적인 이차원 공간이 만들어진다. 개미는 꺼내 주기 전까지 그 제한의 공간을 맴돌았다.

공간은 그 자체만으로는 무규정의 존재다. 공간은 점과 함께, 선과 함께, 면과 함께, 곧 사물에 의지하여 존재하며 우리에게 인식된다. 파티션 너머에서 일하고 있는 동료의 공간을 나의 공간과 구별하려는 직관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우리는 모두 인식이라는 울타리 안에서 살아간다.

하지만 모두가 동일한 인식을 가지고 생을 사는 것은 아니다. 인식은 세계의 객관적 실재를 반영하는 것이 아닌, 세계에 대한 해석이기 때문이다. 나의 속임수에 갇힌 개미는 세계의 실재를 보지 못했고 그 울타리가 제안하는 짓궂은 해석을 자신의 인식으로 무력하게 받아들였다. 이처럼 인식의 울타리, 곧 세계에 대한 해석은 자유로운 결정처럼 보이지만 외부 조건의 영향을 받기도 한다.

그러니까 인식의 울타리는 세계의 실재와 정확하게 일치하지 않을뿐더러 인식 그 자체도 순수하게 자유로운 판단이 아니라는 한계 사실을 받아들여야 한다.

하지만 이러한 인식 과정에서 생기는 여러 상호 작용을 무심하게 건너뛴 채,  아니면 은밀하게 감춘 채, 자신의 해석을 세계의 실재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을 줄곧 마주한다.

얼마 전, 규모가 큰 교회들을 순회하며 결혼과 가정 특강을 하는 유명한 강연자의 강의를 들을 기회가 있었다. 그는 구약성서에서 발견한 창조 신학에서 현대 윤리를 길어 올렸다. 그는 혼돈에서 질서를 바로 세운 하나님의 창조 질서를 잘 이해하면 건강한 가정의 원리를 발견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는 창세기 3:16-17을 근거 삼아 출산과 육아를 여성의 노동으로, 바깥일을 남성의 노동으로 구분하며 이 두 노동을 동등한 것이라고 말했다. 금세 장내는 웅성이는 소리로 가득 찼다. 과연 오늘날 출산과 육아가 합당한 노동의 대가를 받고 있는지 의문을 제기하는 이들도 있었고, 바깥일은 남성의 노동이라는 주장이 자칫 사회의 성 불평등을 지지하는 논리로 작용할 수 있다고 우려하는 이들도 있었다.

청중의 반응을 감지한 강연자는 부리나케 말을 이었다. 이전에 동일한 강의를 하다가 고소를 당할 뻔했다고, 자신을 고소한 이들이 기독교 신앙을 가진 것이 의아하다며 조소했고, 이 주장은 자신의 주장이 아닌 명백한 창조 질서임을 다시 한번 강조했다. 나는 일그러졌다. 강연자가 주장한 성 역할 논리에도 물론 동의할 수 없었지만, 나를 불편하게 한 것은 자신의 해석과 세계의 실재를 유착시킨 강연자의 확신이었다.

만약 그가 자신의 해석과 세계의 실재 사이의 여백을 다소 인정했다면 나는 그 시간을 무심하게 흘려보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는 질서를 확신했고 그 질서에서 벗어난 예외들의 외침 앞에 다시 질서를 놓았다. 그리고 그 질서가 자신의 울타리일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과감히 배제했다.

불확실하고 혼돈한 세계에 내던져진 인간은 확실성과 질서를 끝없이 추구함으로써 정체불명의 생에 의미를 부여하며 살아간다. 어쩌면 이는 인간의 끝나지 않는 소명일지도 모른다. 하나님은 세계를 창조하셨지만 그 세계의 이름을 정하시지 않았다. 그 중요한 일을 아담에게 일임하셨다.

이는 인간의 숙명을 미리 보여 주는 예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인간의 이름 짓기보다 세계가 먼저 존재했다는 사실이다. 그렇기 때문에 세계에 대한 우리의 의미가 세계의 실재와 결코 일치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이러한 태도는 굳이 관념을 통과해서 얻어지는 것만은 아니다.

삶을 정직하게 들여다보는 이들은 안다. 삶의 본질은 질서보다 무질서에, 확실성보다는 불확실성에 가깝다는 것을. 사랑하는 이들을 하루아침에 잃기도 하고, 의미라고 여겨 온 일들이 순식간에 무의미로 굴러떨어지는 게 우리가 처한 현실이다.

미국의 과학 전문 기자 룰루 밀러(Lulu Miller)의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Why Fish Don’t Exist⟫는 세계의 본질을 회피한 채 질서와 확실성을 추구하는 일의 위험성을 경고한다. 이 책은 19세기를 살던 어류학자 데이비드 스타 조던(David Starr Jordan)의 이야기를 다룬다.

데이비드는 30년 이상 세계를 누비며 아직 공식적으로 발견되지 않은 물고기들을 수집한 과학자다. 그는 정체 모를 물고기들을 에탄올 유리단지에 담가 박제를 한 뒤 신성한 의식, 곧 학명을 부여하는 일을 한다. 그는 이름 없는 존재에게 이름을 불어넣는 신적 존재다.

1906년 4월18일, 샌프란시스코에 대지진이 발생한다. 흔들림이 멈춘 즉시 데이비드는 자신의 연구실로 달려간다. 연구실 바닥은 깨진 유리 조각과 병에서 떨어진 이름표들로 가득했다. 한 인간이 30년 동안 이루어 놓은 질서가 다시 혼돈으로 돌아간 것이다. 하지만 놀랍게도 데이비드는 널브러진 물고기의 시체들을 다시 병에 차근히 담기 시작한다.

저자 룰루 밀러는 데이비드의 이 경이로운 회복탄력성이 어디서 비롯한 것인지 궁금증을 갖는다. 데이비드와 관련한 무수한 자료를 수집하던 밀러는 뜻밖의 충격적인 사실을 발견한다. 데이비드는 당대 열광적인 우생학자였다는 것. 그는 장애인을 포함한 사회적 소수자의 강제 불임화 법을 지지했다.

밀러는 데이비드가 “자기가 원하는 것은 다 옳은 것이라고 자신을 설득할 수 있는 무시무시한 능력”을 지니고 있었다고 말한다. 그는 평생 물고기를 들여다보며 쌓아 올린 이론에 근거하여 생명들에게는 질서, 곧 우열이 존재한다고 확고히 믿었고, 이 원리를 통해 더 나은 세계를 만들 수 있다고 확신했다. 그렇게 데이비드의 우생학적 질서 안에서 무수히 많은 사회적 소수자가 희생당하고 만다.

이 책의 결론을 직접적으로 언급하지 않겠다. 끝내 데이비드의 질서와 확실성은 세계의 실재가 아니라는 사실이 드러났고 그의 우생학 프로그램은 정당성을 상실하고 만다.

혼돈에서 질서와 확실성을 찾는 일, 물론 인간의 몫이다. 하지만 세계의 실재를 가린 질서와 확신은 도리어 생명을 다치게 할 수 있다.

끝으로 균형을 잃을 때 줄곧 떠올리는 칼 바르트의 문장을 인용한다.

“긍정과 부정 양자를 연결시키는 것은 모든 이에게 어지럽고 위태로운 곡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이것만 남아 있다. 일초 이상도 긍정이나 부정 속에 머무르게 하지 않고 긍정 속에서 부정을, 부정 속에서 긍정을 밝히는 것만이 우리에게 남아 있다.”

최병인 | 뜰힘 출판사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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