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한 인간
약한 인간
  • 최병인 편집장
  • 승인 2023.06.07 02:26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예수께서 들으시고 그들에게 이르시되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 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느니라.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 ⟪마가복음⟫, 2:17

하루의 업무를 무사히 마치고 퇴근길에 오른다. 출근을 할 때는 줄곧 넉넉한 저녁을 기대하며 가 볼 만한 카페나 서점을 검색하곤 한다. 하지만 퇴근할 시간이 다가오면 머릿속은 온통 아늑한 나의 방 침대 생각으로 가득해진다. 퇴근을 하면 역 입구까지 가장 효율적인 직선 코스를 계산하여 마치 축지법을 쓰듯 발걸음을 낭비하지 않는다. 홍대입구역은 마치 부채꼴의 깔때기를 닮았다. 저녁 6시가 되면 이곳저곳에 흩뿌려져 있던 사람들이 경주라도 하듯 하나의 꼭지점을 향한다. 역 입구부터는 의지를 내려놓고 나의 몸과 정신을 군중의 흐름에 내맡긴다. 지하철 문이 닫히면 불편한 감은 있지만 모두가 쉴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된다. 인간이기에 감당해야 할 하루의 책임을 마친 이들은 그제야 스스로에게 자유를 허락한다. 눈을 감고 음악을 듣는 이들, 넷플릭스를 보는 이들, 퇴근길이 겹치는 직장 동료와 소곤대는 이들.

그런데 갑자기 그들 사이로 날카로운 외침이 파고든다. “죄를 회개하십시오. 예수를 믿으시오. 예수를 믿으면 천국에 입성하지만 그렇지 않으면 지옥의 심판이 기다리고 있습니다.”지하철 선지자의 음성을 듣자마자 어깨에 긴장이 들어가고 온 신경이 곤두선다. 다행히도 나는 이 시대 최고의 발명품을 가지고 있다. 노이즈 캔슬링 에어팟. 말러의 교향곡 제5번 4악장 아다지에토를 재생하면서 나의 마음이 다시 잔잔해질 거라고 기대한다. 하지만 교향곡의 낮은 음역대로 인해 외부 소음이 완벽하게 차단되지 않는다. 흐릿하게 바깥의 음성이 들린다. “죄를 회개하십시오….” 아름다운 말러 덕분인지 차분히 생각을 이어 간다. 이 장소에 있는 사람들의 죄는 과연 무엇일까. 그들은 무엇을 잘못했길래 하루 종일 마음을 다쳐 가며 일하고 퇴근길에 이러한 날 선 음성을 들어야 하는 것일까. 더 나아가 이러한 공을 사지 못하는 무서운 선언이 과연 복음, 곧 예수가 전한 좋은 소식(Good News)일까.

얼마 전, 우리 교회의 고등학생 아이를 만났다. 우리는 꽤 실제적이고 진지하게 삶과 구원에 관한 대화를 나누었다. 아이는 학교에서 ⟨레미제라블⟩을 보았고 그 영화의 주제가 인간의 구원을 다루는 것 같다고 이야기했다. 자신의 틀과 경계를 넘어서지 않는 자베르와 사랑과 자유로 자신의 경계를 넘어서는 장 발장. 아이는 그 둘의 차이를 확인했다고 막연하게 말했다. 그리고 정말 하고 싶은 말을 했다. “전도사님, 솔직히 기독교에서 말하는 죄가 무엇인지 모르겠어요. 나는 그렇게 큰 죄를 짓지 않았거든요.”

뭉크의 그림
뭉크의 그림

아이의 말을 듣고 잠시 상념에 잠겼다. 그리고 공감했다. 기독교가 주장하는 인간의 죄, 그리고 인간의 실존이 죄인이라는 고백은 과연 무엇을 뜻하는 것인지 오래전의 나도 이해하지 못했다. 회상해 보면 나는 죄를 오직 악으로 규정하여 죄책의 감각이 내 안에서 사라지지 않도록 부단히 애쓴 강박의 시기를 보냈다. 잠시라도 죄를 인식하지 못할 때면 나의 깊은 곳에 있는 죄에 다시 집중하려고 노력했다. 그리고 나는 악하고 끔찍한 죄인이라고 되뇌었다. 하지만 인간의 실존을 오직 악으로만 규정하는 것, 그리고 그 악에 집중함으로써 하나님의 구원을 경험하려는 자기학대적 갈망은 지속가능하지 않았다. 내 속에 있는 악은 결코 완벽하게 사라지지 않았고 하나님은 언제나 두려운 존재였으며 자유를 모르는 나는 오랫동안 고통을 받았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죄에 관해 묻는 아이에게 그것은 인간의 악함이라고 딱 잘라 말할 수 없었다. 우리에게 죄가 있다면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그런 죄가 아닐 수도 있다고 말했다. 아픈 것도, 불쌍한 것도, 가녀린 것도, 마음껏 사랑하지 못하는 것도 죄라는 범주에 들어가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을 나누었다. 그러니까 죄는 인간의 한계 상황인 것이라고. 자베르는 그걸 인정하지 않은 게 아닐까, 그렇다면 장 발장은 그걸 인정한 것일 테고. 그러니까 죄로부터 구원을 받는다는 것은 무작정 인간이 초라해지거나 궁지에 몰리는 일이 결코 아니다. 구원은 좋은 소식이기 때문에. “나는 병든 인간이다…. 나는 악한 인간이다.” 도스토옙스키의 ⟪지하로부터의 수기⟫의 첫 문장이다.

나는 침이 바싹 마르는 이 문장에서 시작하여 복음서에 이르렀다. 인간의 실존을 보여 주는 혼합된 두 가지 상태. 이 아득한 구렁텅이에 빠져 본, 혹은 빠져 있는 사람은 알 것이다. 자신에게 연민의 눈길을 보낼 때면 혐오가 들어차고, 자신을 증오하기에는 나의 존재가 지독하게 가여워 보인다는 것을. 연약한 인간은 결코 악한 인간을 구원할 수 없고, 그 반대도 마찬가지다. 누가 이러한 딜레마에 빠진 인간을 구원할 수 있겠는가. 나는 이 모순의 자리에 처량히 놓여 있는 십자가의 예수를 만났다. 발가벗은 채 고개를 푹 떨구고 있는 예수는 나보다 더 병들어 있었고 수치스러워 보였다. 하지만 그는 나와는 다르게 자신을 증오하지도, 자기 연민에 빠져 삶을 허비하지도 않았다. 그는 끝내 타자를 구원했으며 “다 이루었다”는 말을 남긴 채 눈을 감았다.

예수는 인간의 자리에서, 인간의 구원받아야 할 실존을 명확히 알았다. 복음서 중 가장 이른 시기에 기록된 마가복음은 구원자 예수가 행한 사역을 주로 두 가지로 묘사한다. 악한 귀신을 내쫓는 일과 병든 자를 치유하는 일. 예수는 자신이 이 땅에 온 이유에 관해 말하면서 ‘병든 자’와 ‘죄인’을 동일한 유형으로 묘사한다(막 2:17). 그는 병든 자를 죄인으로 여겼고 죄인을 병든 자로 여겼다. “인간은 죄인이다”라는 명제는 단순하지 않은 복잡한 인간의 실존이 담겨 있다. 그런 뜻에서 도스토옙스키의 인간 이해는 의미심장하다. ‘약함과 악함.’ 만약 인간의 실존, 곧 기독교가 말하는 죄에서 인간의 약함을 발견한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구원을 더욱이 좋은 소식으로 여길 수 있을 것이며 이웃에게 긍휼과 사랑의 태도로 다가갈 수 있을 것이다.

어쩌면 인간의 악함보다 약함을 인정하는 것이 더 어려운 세상이 되어 버렸는지도 모르겠다. 병들고 약한 자신이 혹여 거센 세상에 훼손당하지는 않을까 무장하며 사는 나, 그리고 이웃에게 그리스도는 말씀하신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마 11:28).

최병인 (뜰힘 출판사 편집장)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