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의 마지막 말
예수의 마지막 말
  • 최병인 편집장
  • 승인 2023.12.14 08: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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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막 15:34).

두 손 두 발이 날카로운 못으로 관통된 채 십자가에 붙어 있는 예수. 그곳은 격식이나 체면을 차릴 수 있는 자리가 아니었다. 속내를 들추어 낼 수밖에 없는 곳, 모든 가능성이 닫힌 막다른 곳이었다. 십자가에 달린 예수의 언어는 기도의 형식을 갖출 수 없었다. 기도는 호흡을 살펴야 하지만 십자가에서는 호흡을 할 수 없었다. 기도는 두 손을 모으고 무릎을 꿇고 해야 하지만 십자가에서는 두 손을 모을 수 없었고 무릎을 꿇을 수 없었다. 예수는 그저 토로할 따름이었다. 시간이 흐르면서 사람들은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었다는 사실을, 심지어 그가 하나님 자신이었다는 사실을 알아차리게 되었다. 그래서 십자가 위 예수의 말이 하나님의 말이었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성자 하나님은 성부 하나님에게 속내를 들켰다.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부서의 한 아이가 물었다. “전도사님, 하나님이 계신데 가난한 사람들이 왜 있나요?” 나는 이 물음을 가진 아이가 하나님과 세계를 아름다운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다고 생각했다. ‘하나님’과 ‘가난한 사람들’의 존재가 서로를 배타하고 있다는 아이의 판단이 하나님은 정의롭고, 그분이 세계를 방치하지 않고 올바른 뜻으로 섭리하고 있다는 믿음의 고백처럼 들렸기 때문이다. 이러한 종류의 물음을 피해 갈 수 있는 인간은 없다. 이 물음을 가져 본 자, 가지고 있는 자, 가지게 될 자로 나뉠 뿐이다. 이 물음은 그리스도교 신앙을 가진 인간의 실존과 가장 잇닿아 있는 문제다. 바로 악의 존재에 대한 물음이다.

신학은 오랫동안 악의 전형을 자연 악(natural evil)과 도덕 악(moral evil)으로 구분하여 설명해 왔다. 자연 악은 질병, 사고, 자연재해 등과 같은 인간의 의지와 관계없이 발생하는 고통을 뜻하고, 도덕 악은 죄성을 가진 인간이 서로에게 피해를 입히거나 자연과 세계에 피해를 입혀 발생하는 고통을 뜻한다. 자연 악과 도덕 악은 논리적으로 구분되지만 사안에 따라서 원인을 공유하는 경우도 있다. 가령 COVID-19과 같은 인수공통감염병은 현상적으로는 자연 악처럼 보이지만, 질병의 원인과 과정을 쫓다 보면 도덕 악으로 분류된다. 반면에 가난과 빈곤의 문제는 전적으로 도덕 악에 속한다. ≪왜 세계의 절반은 굶주리는가≫에서 장 지글러는 120억의 인구가 먹고도 남을 만큼의 식량이 생산되는 현대 사회에서 5초에 한 명의 어린이가 아사餓死하는 이유를 사회 구조의 문제라고 밝힌다. 사실 자연 악과 도덕 악을 잘 분류한다고 해서 우리에게 악의 현실이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악은 여전히 남아 있다.

우리가 믿고 있는 하나님은 무에서 유를 창조하신 분으로서 존재하는 모든 것의 원인이시다. 또한 인류를 선한 종착지로 이끌어 가시는 역사에 참여하는 주인이시다. 그런데 이러한 사실은 마치 믿음의 논리처럼 “바라는 것들의 확신”이며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다. 고백으로서 유효한 사실. 이러한 신앙의 고백들은 대개 우리의 가혹한 현실 앞에서 그 고백의 정당성을 상실하고 만다. 

무에서 유를 창조하신 하나님을 고백했을 때 우리는 악의 실재를 설명하는 데 있어서 큰 딜레마에 놓인다. 하나님이 세계 내 존재하는 모든 것의 원인이라면 악의 기원도 하나의 시작점에 놓일 것이다. 만약 악을 하나님의 창조와 관계없는 실재로 상정한다면 무에서 유를 창조하신 하나님의 사역 또한 성립할 수 없을 것이다. 그래서 교부 아우구스티누스는 악의 실재를 무無, 곧 ‘없음’으로 정의하며 악의 현실성을 표현한 것이다.

하나님은 역사에 참여하는 주인이라는 신앙 고백의 경우도 악의 문제를 다루는 데 어려움이 있다. 하나님이 거대한 역사의 흐름을 주관한다고 고백하는 사람들 중 몇몇은 이 세상에 존재하는 악과 고통의 문제를, 바다 위에 떨어진 물방울이 금새 희석되어 형태가 사라지듯, 큰 역사 속에 아주 작은 흠 정도로 쉽게 환원하는 우를 범하곤 한다. 인간에게 있어서 악과 고통의 현실은 어떠한 방식으로든 억압되어서는 안 되는 문제다. 도스또예프스끼의 ≪까라마조프 씨네 형제들≫에서 둘째 아들 이반은 어머니 앞에서 잔인하게 사냥개에 물려 살해당한 아이의 이야기를 들려주며 악과 고통의 무게를 무심하게 건너뛴 채 세계의 조화를 섣불리 말하는 자들을 비판한다.

“‘주여, 당신이 옳았나이다!’ 하고 소리칠 수 있는 그런 시간이 올지도 모르지만, 그때도 난 그렇게 외치고 싶지 않단 말이야. 시간이 있는 동안 나는 서둘러 나 자신을 지키겠어. 그리고 고상한 조화 따위는 완전히 포기하고 말겠어.…왜냐하면 그 애의 눈물은 보상받지 못한 채 버려졌기 때문이야. 그 애의 눈물은 보상받아야만 해. 그렇지 않으면 조화란 불가능할 테니.…무엇으로 그걸 보상할 수 있겠니? 그게 정말 가능할까? 그 눈물에 대한 복수가 될 수 있을까? 내겐 그 눈물에 대한 복수도, 가해자들의 지옥도 아무 의미가 없어.…난 차라리 보상받지 못한 고통과 함께 남고 싶어.”표도르 미하일로비치 도스또예프스끼, ⟪까라마조프 씨네 형제들⟫, 제5권 찬반론, 반역

성서는 악의 기원에 관해서 침묵한다. 오직 악과 고통의 현실만을 보여 줄 뿐이다. 이웃을 착취하고 억압하는 인간, 이웃의 배우자를 빼앗는 인간, 이웃의 재산을 강탈하는 인간, 사랑하는 이를 떠나 보낸 인간, 질병의 고통 속에 놓인 인간, 귀신에게 사로잡힌 인간, 사회적 소외를 당하는 인간, 재산을 잃고 길바닥에 나앉은 인간, 태어날 때부터 장애를 가진 인간, 그리고 가난한 인간. 비극은 마치 찬란한 햇살이 비추일 때 비로소 드러나는 그림자와 같다. 우리 모두의 뒤꿈치에는 그림자가 있다. 선하신 하나님은 인간에게 왜 이러한 끔찍하고 불편한 악을 허용하셨는가, 하는 질문은 가당찮다. 삼위일체 하나님은 자신을 닮은 존재로 인간을 창조하셨다. 삼위일체 하나님은 자유로이 독립적이면서 사랑으로 연합을 이루신 분이다. 바울은 주님의 영이 계신 곳에 ‘자유’가 있다고 말하며(고전 3:17), 신자들에게 ‘사랑’을 추구하라고 가르친다(고전 14:1).

 인간은 삼위일체 하나님의 존재 방식처럼 자유롭게 사랑을 선택하며 세계를 살아야 할 책임이 있다. 자유로운 존재는 모든 가능성을 선물 받은 존재다. 자유는 악의 가능성마저 가지고 있다. 자유는 모든 잠재력이기에 선한 저력이면서 동시에 위험한 힘이다.

인간이 되신 하나님, 곧 예수는 보통 인간처럼 모든 가능성을 지닌 채 이 세상에 오셨다. 그분은 악의 관념이나 기원에 관심을 두지 않고, 악과 고통의 현실 곁에 머문 채 사람들에게 자유로운 사랑을 행하셨다. 혹자는 예수가 신이었기 때문에 악의 존재를 간파했고 그것을 세계의 질서와 쉽게 조화시켰을 것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예수는 삶의 끝자락에 이르러서도 자신이 처한 악과 고통의 현실을 설명해 내지 못했다.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마가는 이 말을 끝으로 예수가 숨을 거두었다고 증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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