쉬는 게 불안해서
쉬는 게 불안해서
  • 최병인 편집장
  • 승인 2023.04.27 0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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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인의 약 10% 이상이 경험한 적 있는 속도공포증(Tachophobia)은 빠르게 움직이는 것과 관련한 과거의 트라우마에서 비롯하는데, 속력으로 인해 물리적-정신적 피해를 입은 사람들이 겪는 불안 증상이다. 몇 개월 전 당혹한 경험들을 했다. 집과 약 80킬로미터 거리에 떨어진 교회에 출근하기 위해 운전대에 앉았는데 몸이 그 상태로 얼어붙어 도무지 액셀러레이터에 발을 기댈 수 없었다.

고속도로를 세차게 달려야 하는 금방의 미래를 상상하니 알 수 없는 두려움이 엄습했다. 과연 달릴 수 있을까, 하는 초라한 생각이 들었다. 히터와 열선 시트를 켜고 몸의 긴장을 일부러 풀어 주었다. 크게 심호흡을 하고 혼잣말을 했다. “하나님 저 괜찮은 거 맞죠?” 이상했다. 속도공포증은 과거에 겪은 사건의 트라우마와 관련한 증상인데, 나는 교통사고와 같은 일을 당한 적이 없다. 그렇다면 나의 몸은 왜 속력에 위협을 느꼈던 것일까.

원인이 불분명한 두려움을 경험한 뒤 얼마 지나지 않아 내 몸의 낯선 증상을 또 하나 발견했다. 빼곡한 업무를 소화하던 중 틈새 시간이 생겨서 잠시 바깥으로 나와 벤치에 앉았다. 그런데 불안이 밀려와 가만히 자리에 머무는 것이 어려웠다. 멈추어 있다 보니 나의 심장 박동이 거세게 느껴졌다. 그래서 장소를 이리저리 옮겨 다녔다. 평소였으면 눈을 지그시 감고 몸을 이완했을 텐데, 그날은 그렇게 하지 못했다. 빠른 속도로 움직이고 있을 때는 모르다가 멈추면 그제야 멀미가 밀려오는 현상과 흡사했다. 정상적이지 않은 이 증상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했다. 나는 심장 소리에 불안을 느꼈고, 몸을 움직일 때는 불안하지 않았다.

사실 심장 소리는 가장 순수한 신호다. 초등학생 때 아버지가 집에 청진기를 사 들고 오신 적이 있다.
아마도 학교 숙제 때문이었던 것 같다. 나는 틈만 나면 청진기를 꺼내서 집음부를 왼쪽 가슴에 두고 한참 동안 심장 소리를 듣곤 했다. 그러다가 잠이 들 때도 많았다. 심장 소리는 정말 편안했다.

그런데 어른이 된 나는 왜 심장 소리를 듣지 못하는 것일까. 심장 소리는 그 누구의 소리도 아닌 나의 소리다. 나를 지칭하는 수많은 명사들 너머에 있는 진짜 나의 소리. 그 근원의 소리가 들려 올 때는 언제인가. 그 어느 것으로도 환원할 수 없는 순수한 나 자신과 조우하는 순간이다. 나는 그 순간을 받아들일 힘을 가지지 못했다. 나의 존재를 직면하는 것이 민망했다. 나의 존재가 내뿜는 원초적 소리를 듣는다는 게 왠지 모르게 부끄러웠다.

나는 너무 바빴다. 아무도 요구하지 않았지만, 스스로 바쁜 사람이 되었다. 때로는 멈추어야 하는데, 멈추는 법을 잊고 살았다. 불안 때문에 그런 것일까. 아니면, 단순히 성격의 문제인 걸까. 무언가를 지속하고 있지만, 끝내 지속 가능하지 않은 삶을 살고 있는 딜레마에 빠진 나를 발견했다. 사진학을 공부하면서 나름 깨닫게 된 미학이 있다. 좋은 사진 결과물을 만들기 위해서는 프레임 속 피사체를 더하는 데 집중하기보다는, 되도록 피사체들을 프레임 바깥으로 빼내는 데 집중해야 한다는 사실이었다.

예술의 완성도를 좌우하는 것은 제거와 단순함이다. 이 원리는 삶의 영역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로 적용될 때가 많다. 무한대로 추가되는 일상, 단순하지 않은 일상, 곧 손에 잡히지 않는 복잡한 일상은 삶의 완성도를 망가뜨린다.

삶을 단순하게 만들기 위해서 나에게 필요한 건 다름 아닌 안식이었다. 다소 어렵게 느껴질 만한 단어, 안식은 풀어 말해 쉼을 뜻한다. 쉼은 능동적이고 주체적인 행위다.

우리는 막연하게 일을 능동적이고 주체적인 행위로 간주하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보통 우리는 일을 장악하기보다 일에 장악당하며 산다. 일을 하는 것보다 일을 멈추는 게 어려운 세상이다. 나 오늘 쉴 거야, 라고 당차게 말해 본 적이 도대체 언제인지 잘 떠오르지 않았다. 누군가 나에게 쉬었니, 라고 물을 때면 종종 불분명하게 대답하곤 했다. 응, 조금 쉰 것 같아, 라고. 사실 그건 쉰 게 아니라, 퍼진 거였다. 나는 쉼을 ‘당하며’ 사는
사람이었다. 그건 올바른 쉼이 아닌데도 나는 그걸 쉼이라고 여기며 살았다.

올바른 안식(쉼)을 할 수 있는 사람은 오히려 삶의 주도권을 꽉 쥔 사람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 본다. 기꺼이 쉴 수 있는 태도는 이미 그 사람이 살아가는 삶의 완성도를 보여 준다. 「창세기」는 하나님이 6일 동안 세계를 창조하고 7일이 되는 날, 안식했다고 말한다. 하나님은 그 어려운 능동적인 안식을 감행했다. 창조와 안식의 순환은 의미심장하다. 창조가 안식으로 이어지고 그 안식이 다시 창조를 유지하고 발전시키는 형태다. 이를 묵상할 때면 안식의 창조성에 참여하고 싶은 마음이 더없이 커진다.

이러한 말들을 가정 교회 식구들에게 전부 나누었다. 쉬는 게 불안했다고.

이제는 안식을 연습해 보려고 한다고. 옆에 앉은 권사님이 내 손을 꼭 잡아 주시면서 잘하고 있으니 걱정할 것 하나 없다고 말씀해 주셨다. 나는 여전히 부족한 대답을 했다. 또 ‘열심히’ 해보겠다고 헛된 긍지를 다진 나에게 권사님은 다시 말씀하셨다. “열심히 말고 즐겁게.”

최병인 | 뜰힘 출판사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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