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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최병인 편집장
  • 승인 2024.02.09 09: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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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과 봄 사이 계절이 되면 교회의 고등학생 아이들과 함께 강원도 태백에 자리한 예수원을 방문한다. 새로운 학기를 시작하기 전에 낯선 시간과 공간 안으로 들어가 하나님과 자신을 돌아보자는 취지다.

예수원 피정을 가기 위해서는 한 달 전에 미리 방문 예약을 해야 했기에 명단을 작성했다. 아이들의 이름과 나이를 알맞게 맞추었다. 고등학교 1학년이 된 아이들 옆에 습관적으로 16이라는 숫자를 매달고는 아차 실수한 걸 발견하고 17로 수정했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16과 17은 전연 다른 세계에 속한 숫자다. 16의 아이들이 마냥 예쁘다면, 17의 아이들은 애달프다.

삶을 존 시스템(Zone System, 미국의 사진가 안셀 아담스가 공식화한 흑백 사진의 열한 가지 빛 스펙트럼 구역)으로 비유한다면, 17의 아이들은 중간 어디쯤 스케일에 있다. 그곳은 흑과 백이 교차하며 어렴풋하게 뒤섞인 구간, 그래서 회색이라고 불리는 자리다.

아이들의 명단을 전부 적고 마지막 칸에 인솔자인 나의 이름과 나이를 입력했다. ‘최병인, 32’ 예기치 않은 생각이 들었다. 나의 이름은 분명히 나의 것이라고 여겨졌지만, 뒤에 붙은 ‘32’라는 숫자가 나의 것이라는 게 믿기지 않았다. “저게 뭐지, 스타벅스 주문 번호인가.” ‘32’는 그리 큰 숫자는 아니지만 , 꽤 무거운 숫자다. 만약 식당의 웨이팅이 32명이 남았다고 한다면 나는 절대 기다리지 않을 것이다.

경찰공무원 체력 시험에서 32는 윗몸일으키기 최소 기준이다. 그러니까 32는 나의 사고방식 안에서 무언가 적지 않게 축적된 숫자이며, 그 아래로는 기댈 수 없는 가장 작은 값이 자명하다. 나에게는 아직도 ‘32’보다는 ‘17’이라는 숫자가 익숙한 게 사실이다. 어쩌면 나의 삶 곁에 숫자가 있다는 걸 인식한 순간이 17을 본 이후, 처음이 아닐까. 그렇기 때문에 ‘17’과 ‘32’는 명단을 작성하는 그 순간 나에게 큰 괴리로 다가왔지만, 사실 두 숫자는 서로를 밀어내는 것이 아닌 수미상관, 곧 나의 서사에서 시작과 끝을 이루는 상징이라는 결론에 도달하게 되었다.

건조한 의미주의자인 나는 삶 곳곳에 숨겨진, 때로는 갑작스럽게 뚝 떨어지는 상징을 찾곤 한다. 누가 뭐라고 해도 나의 세계는 계시록의 세계다.‘17…32’가 나의 서사에서는 하나의 존 스케일로 묶이는 구간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게 되었다.

‘17…32’의 나는 가능성을 좇아 살았다. 이것과 저것 모두가 나에게 주어진 가능성이라고 생각하며 달려왔다. 그래서 불안한 삶을 살았다. 어디로든 흘러갈 수 있는, 그래서 어디로 흘러가야 할지 알 수 없는 실존의 위기는 나의 동반자였다. 내가 믿고 있는 가능성이 불안을 초래하는 것인지, 불안하기 때문에 가능성을 찾고 있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가능성과 불안은 내 삶에서 선택의 급전환을 할 수 있는 용기를 주기도 했다. 몇 년 전 또 하나의 상징적인 사건을 마주했다. 나의 친구 중에는 티아고 알칸타라(현 리버풀 소속 미드필더)와 같은 이가 있다. 그는 조기축구 세계 안에서 중원의 마법사라고 불리며 칭송을 받았다. 그 친구의 장기는 급전환을 통한 탈압박이었는데, 어느 날 그의 축구화가 잔디에 걸려 무릎이 반대로 돌아가 버렸다. 나는 깨달았다. “급전환은 치명상을 줄 수 있는 것이로구나.” 결이 중요하다.

과거, 현재, 미래를 하나의 서사로 엮어 내는 결은 방식에 따라 달리 표현되겠지만, 인간의 자의식에 있어서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가능성과 불안은 자기를 상실할 만큼의 전환을 우리에게 강력히 요구한다. 가운뎃점(…)은 우리의 족쇄가 될 것이고 더 나은 미래를 가로막는 지난날의 악령이라고 말함으로써 우리를 위협한다.

과연 무엇이 악령인가. 현재 나의 부정을 그 자체로 부정한 채 인간은 한 발자국이라도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존재일까. 찢겨진 서사의 분절된 조각에서 인간은 자신의 존재를 정직하게 마주할 수 있을까. 만약 그럴 수 있다면, 그것은 기만이다. 나는 줄곧 기만하며 살았다. 출처를 알 수 없는 데서 오는 두려움, 과정이 사라져 버린 공허함을 가리기 위해 줄곧 격양되었고 해명했다. 존재를 증명해야 하는 역설. 어쩌면 그 상태가 바로 구원받아야 할 인간의 실존인지도 모르겠다.

 ‘…32…’라는 가운뎃점 사이에 있는 숫자를 응시한다. 다음 구간을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불가능성 곁에 머물고 싶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을 떠올리기보다 내가 할 수 없는 것을 떠올릴 때, 내가 바라는 것을 소망하기보다 내가 바랄 수 없는 것을 인정할 때, 나는 결에 따라 서 있게 될 것이다. 그래야만 흘러갈 수 있을 테다.

넓을 수록 멈추어 있고 좁을 수록 흘러가는 자연의 이치는 구원의 문을 너비로 비유한 예수님의 말씀과 일맥상통한다. 구원의 문이 좁다는 것은 그곳을 통과하는 모든 생명이 살아서 흐르고 있다는 걸 뜻한다. 어쩌면 그 문은 모두의 좁은 문이 아닌 각자의 좁은 문이다. 불가능성에 기반한 좁은 서사는 비록 과히 드러나지 않고 감추어져 있지만 그 자체로 굳건하다. 나의 존재를 해명하지 않아도 충분함을 느끼는 날이 오기를 기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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