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불어 악마 예배도 가져야 해
더불어 악마 예배도 가져야 해
  • 최병인 편집장
  • 승인 2023.10.04 07: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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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신에 대한 예배와 더불어 악마 예배도 가져야 해.” 아이들이 하나같이 밑줄 그은 ⟪데미안⟫의 문장이다. 이 독서 모임이 교회 바깥 모임이었다면 나는 충분히 낭만적일 수 있었을 텐데, 이 모임은 교회 안, 심지어 내가 담당 사역자로 있는 청소년부의 독서 모임이었다. 그래서 아주 조금의 긴장도가 올라갔다.

한두 아이도 아니고 모든 아이를 멈추어 세운 도끼와 같은 이 문장이 가진 본뜻은 무엇일까. ⟪데미안⟫을 쓴 헤르만 헤세는 19세기 독일에서 태어난 문인이다. 이 책을 쓸 당시 그의 나이는 40대였다. 초판 표지에 적힌 저자명은 싱클레어, 바로 이 소설의 주인공이다. 헤세는 필명으로 이 위대한 소설을 발표했다. 그는 선교사 집안에서 자라 신학교에 입학할 만큼 기독교 문화의 짙은 공기 속에 머물렀다. 그 시절의 기억은 그의 소설 ⟪수레바퀴 아래서⟫에 잘 담겨 있는데 무척 부정적으로 반영되어 있다.

헤세는 끝내 신학교를 자퇴했고, 시계 부속품 공장에서 견습공으로 일하다가 얼마 뒤에는 튀빙겐 서점에서 일을 하며 본격적으로 글을 쓰기 시작했다. 역사주의에 경도된 19세기 말 독일 학문의 사조 곁에서 시인은 자신의 언어를 찾기 위해 막스 데미안의 말처럼 “알에서 나오려고 몸부림”을 친 것이다. ⟪데미안⟫은 제1차세계대전이 종전한 직후인 1919년에 출간했는데, 이 소설은 서구의 인간과 사회에 관한 낙관적 이데올로기의 종결을 선언하는 작품이다.

주인공 싱클레어는 종교라는 단단한 장벽 울타리 안에서 자란 아이다. 그곳은 안전한 보금자리이며, 결코 악이 들어찰 수 없는 선한 공간이다. 온실 속 싱클레어, 그는 여러 사건을 통해 그 장벽에 금이 가는 현실에 놓인다. 이전에는 마주해 본 적 없는 악, 곧 인간과 세계의 부정 요소에 직면한다. 뿐만 아니라 자신에게 내재한 악의 실존에 부딪힌다. 힘에의 의지, 거짓, 죄책, 불안, 혐오. 색으로 치자면 하얗지 않은 검정 것들이 싱클레어를 둘러싼다.

그는 다시 반대의 것을 갈망한다. 모든 악을 내던지고 이전에 머물던 환한 자리로 회귀하고 싶은 싱클레어에게 어느 날 막스 데미안이 나타난다. 그의 이름은 Demonian에서 비롯했다. 악마와 같은 존재. 데미안의 악마성은 파우스트 박사와 동행한 메피스토펠레스와는 다른 악마성이다. 괴테가 ⟪파우스트⟫에서 묘사한 악마는 신과 대립하는 존재, ⟪욥기⟫에 나타난 사탄, 곧 인간을 타락시키는 존재다. 하지만 한 세기가 흐른 뒤 헤세가 묘사한 악마성은 성서의 사탄을 반영하지 않는다.

선과 악을 동시에 지니고 있는 존재, 바로 아브라삭스Abrasax가 헤세가 떠올린 악마성이다. 이 낯선 신적 존재의 유래는 고대 페르시아 종교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헤르만 헤세는 인도 선교사 아버지와 불교 연구자 외삼촌의 영향으로 인해 동양 사상을 일찍이 경험했다. 다시 돌아가서, 싱클레어는 데미안을 만난 뒤, 세계를 새롭게 해석하는 법을 배운다. 데미안은 싱클레어에게 아브라삭스의 존재를 일깨워 줌으로써 진리는 바깥이 아닌 인간 존재 내면에 깃들어 있다는 사실을 밝혀 준다. 그리고 끝내 데미안은 서구의 몰락을 예언한다. ⟪데미안⟫은 20세기의 ⟪욥기⟫이며 ⟪계시록⟫이다.

아이들이 밑줄 그은 문장. “우리는 신에 대한 예배와 더불어 악마 예배도 가져야 해.” 곰곰 생각해 보니 먹먹했다. 청소년들과 교회에서 두 해를 고스란히 보내고 있는 나는 아이들의 삶에 더 가까이 다가서고 있다. 혹자는 청소년기를 터널에 비유하곤 한다. 마치 자신은 그 터널을 지난 상태인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인생의 어느 특정한 어두운 시기란 과연 존재하는 것일까. 인생 자체가 유한한 터널이다. 청소년은 이제 막 그 세계에 진입했을 뿐이다.

그래서 더 낯설고 더 당혹한 것이다. 그래서 나는 아이들에게 연대감을 느낀다. 내가 아이들의 삶을 이해해 줄 수 있다는 것은 아이들이 내 삶을 이해해 줄 수 있다는 것의 반대말이기에. 삶이란 단순하지만 않다는 것, 찬란하지만 않다는 것, 기쁨과 슬픔이 공존한다는 것을 아이들이 경험하기 시작했다. 몸과 마음에 원치 않는 생채기들이 일고 있다. 원인이 무엇인지 파악할 수 없을 만큼 복잡한 내면의 우울감과 좌절감, 그리고 공포감. 그리고 바깥에서 발생하는 수많은 위험들. 세계의 환한 것들과 어두운 것들을 분리할수록 고통이 가중된다는 사실을 경험적으로 알아차린 아이들의 무덤덤한 말들에 서글픔이 밀려왔다.

나는 문득 엔도 슈사쿠의 ⟪깊은 강⟫이 떠올랐고, 그 소설에 관해 아이들에게 말해 주었다. 나는 이 소설을 생각하면 하나의 단어가 떠오른다. 십자고상十字苦像.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의 고난苦難을 새긴 형상을 뜻한다. 예수가 매달려 계시지 않은 십자가상은 그리스도의 승리를 표현하는 상징물이다. 그런데도 나는 그리스도가 매달려 계신 십자고상에 더 마음이 흔들린다. 예수의 고난을 목도할 때 승리의 참된 의미가 이해되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의 승리는 사랑의 극치다.

예수가 보이지 않는 십자가는 나에게 어떤 의미도 남기지 못한다. 현실을 반영하지 않는 관념처럼 공허하다. 십자고상은 ⟪깊은 강⟫의 주요한 언어다. 예수는 악의 현실을 외면하고 억압한 채 선의 이상만을 추구하지 않았으며, 냉소의 미소를 머금은 채 선과 악을 하나의 체계로 포섭한 이론가도 아니었다. 그는 악의 현실을 적극적으로 끌어안은 채 선, 곧 사랑을 향해 적극적으로 나아갔다.

그리스도를 따른다는 것은 그래서 어려운 일이다.

부조리한 현실을 억압하고 외면할 수 있는 가능성이나 이론이 그의 삶 속에 흔적으로 나타나지 않기 때문이다. 그는 사랑하려다 다쳤고 다쳐야만 사랑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나는 세계의 상반된 두 측면과 직접 마주하기 시작한 우리 교회 아이들이 그리스도를 따르는 삶을 잘 배워 나갔으면 좋겠다. 우리가 물고기고, 세계가 어항이라면, 사랑은 물과 같다. 우리는 사랑을 마시며 살아가는 존재다. 아픔은 사랑이라는 생존 투쟁 가운데 놓여 있을 때 견딜 만한 연약함으로 자리할 수 있다. 사랑하려는 사람이 된다면 아픔은 서서히 작아질 것이다.

최병인 편집장 / <뜰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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