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은 해명이 아니었다
글은 해명이 아니었다
  • 최병인 편집장
  • 승인 2023.09.24 01:3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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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이 안 써진다. 분명히 내 안에는 많은 이야기가 있는데도 그렇다. 나는 글을 여전히 좋아한다.무엇보다 나는 스스로를 표현해야만 숨을 쉴 수 있는 사람이다. 그런 나에게 어느 순간부터 글을 쓰는 것을 주저하는 버릇이 생겼다. 이상한 중압감에 글쓰기를 그만두고 싶다는 생각도 자주 하게 되었다. 그 원인 모를 중압감은 마치 신 앞에 죄를 지었다고 생각할 때 느껴지는 해갈되지 않는 죄책감과 비슷하다. 나는 왜 글 쓰는 것에 죄책감을 느끼게 된 것일까?

​몇 년 전, 광화문 교보문고에서 인문학자 김용규 선생님의 강연을 우연히 듣게 되었다. 청중 가운데 한 명이 김용규 선생님에게 이런 질문을 했다. “선생님은 왜 언론에 자신을 자주 비추지 않으세요?” 보아하니 선생님은 원래부터 언론을 피하셨던 분이 아니었다. 하루는 한 기자가 김용규 선생님을 찾아와서 많은 질문을 쏟아 냈다고 한다.

그 질문들은 선생님의 행보에 관한 이야기들이었다. “왜 독일에서 공부를 하셨나요?”, “신학과 철학을 함께 공부하신 이유가 있으신가요?” 등 저자에게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충분히 궁금할 법한 질문들이었다. 그날, 선생님은 무수히 많은 질문에 정성껏 답변을 한 뒤 집으로 돌아갔다고 한다. 하지만 선생님은 그 시간을 정작 행복하게 기억하지 않으셨다. 그분은 말하길, “오히려 심한 구토 증세가 있더군요”라고 했다. 기자의 질문들에 열거한 답변들이 사실은 진실이 아니었다고 덧붙였다.

기사의 취지에 맞게끔 자신의 지난날들을 과장하고 포장했다고, 무척 솔직하지 않았다고, 고백했다. 이유를 알지 못한 채 걸어온 인생의 여백에 명백한 인과관계를 부여하는 것만큼이나 부자연스러운 것이 어디 있겠는가? 그 이후로 김용규 선생님은 솔직할 수 없는 자리를 최대한 피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부자연스러움에서 죄책감을 느낀 것이다

내가 글을 쓰는 것에 죄책감을 느끼고 있는 부분 또한 정확히 부자연스러운 글쓰기 태도에서 비롯한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글쓰기가 자연스러움과 원활함만으로 이루어지는 행위라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글이란 본래 불편함 가운데서도 창작되어야 하며, 글쓰기란 삐걱거리면서도 중심을 잡아가는 과정이기 때문이다. 그 고통을 수반한 노동이 비록 글쓰기에만 국한되겠는가?

세상의 모든 아름다운 결실은 삶과 죽음, 희망과 절망과 같은 가장 어울리지 않는 두 지점의 극단 모두를 끌어안을 때 비로소 이루어진다.

이러한 불편한 삶의 원리에 있어서는 글마저도 예외가 될 수 없다. 차라리 나의 글쓰기가 노동의 땀방울이었다면, 또는 사유의 근력이 모자라서 끙끙 앓고 있는 성장의 고통이었더라면 나는 글 쓰는 것을 회피하지 않았을 것이다.

오히려 그러한 노역은 대장장이의 상처, 흔들림으로 버텨 내는 들꽃의 생존 방식처럼 숭고한 과정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는 글을 순수하게 대하지 못했다. 나에게 글이란 나의 존재를 해명하기 위한, 자의식을 강화하기 위한 한낱 도구일 뿐이었다. 표현하는 행위는 내 속에 있는 무언가를 해명해 내는 일이기보다는, 그 무언가를 발출하고 반영하는 일에 가깝다.

어린 시절 자주 다녔던 천마산 공원 한쪽에는 다양한 모양의 거울들이
설치되어 있었다. 그 거울들 앞에 사람들이 많이 모이곤 했는데, 생각해 보면 정말 재미있었다. 키 커 보이고 싶은 사람들은 볼록거울 앞에, 날씬해지고 싶은 사람들은 오목거울 앞에 섰다.

하지만 평면거울 앞에는 사람들이 모이지 않았다. 인간은 본래 자신을 있는 그대로 직면하는 것을 어려워 하는 것 같다. 그것은 나쁘거나 부끄러운 일이 아닌, 지극히 자연스러운 모습이다.

그렇다고 그 자연스러움이 우리를 행복하게 만든다고 말하고 싶지는 않다. 나는 그렇게 진실하지 못한 채 해명해 왔다. 볼록거울 앞에서, 때로는 오목거울 앞에서. 그러니 글쓰기가 죄책감으로 가득 찰 수밖에. 내가 믿고 있는 신, 기독교의 하나님도 인간에게 해명을 요구하거나, 그 자체를 원하시지 않는다. 그것은 신의 자존심 때문이 아니다.

전능한 신은 오래전부터 이미 알고 있었다. 인간이 해명을 통해 얻으려 하는 무언가가 철저히 허무이고, 허상이라는 사실을. 인간이 도무지 좁힐 수 없는 자의식의 괴리를 극복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호숫가에 가서 자신의 몸을 숙이는 일이다.

무릎을 꿇고, 허리를 숙이고, 이마를 보다 낮추면 그제야 보이지 않을까. 잔잔한 호수에 반영된 나의 얼굴을. 눈을 씻고 찾아봐도 내가 아닌 무언가는 호수 속에 없다.

호수 안에 나를 바라보고 있는 사람은 나다. 내가 나를 만난 것이다. 그때 해명은 사라진다. 해명하는 행위가 허상을 향한 공허한 발버둥일 뿐이었다는 진실을 인식할 때에야 비로소 우리는 지금의 나와 뜨거운 포옹을 하게 될 것이다.

순전한 글쓰기는 그때 시작되지 않을까. 글은 해명이 아니었다.

최병인 편집장 / <뜰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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