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65, 우리의 실존은 누가 대변해 줄 것인가
0.65, 우리의 실존은 누가 대변해 줄 것인가
  • 최병인 편집장
  • 승인 2024.03.08 09:2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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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2월, 한 대학교 졸업식에서 한 유명 연예인이 연사로 나섰다. “웬만하면 아무도 믿지 말라. 인생은 독고다이다.” 개인의 추구를 관계 단절과 함께 선언한 그녀의 말은 현대성의 얄팍하고 무책임한 신화를 여실히 보여 준다. 타자와의 관계를 떠나 제 인생을 영위하라는 교훈을 수많은 매체를 통해 듣고 사는 현대인들에게는 아이러니하게도 균일화된 문화를 뚫고 나갈 힘이 없다.

파편화된 개인들은 서로를 가리고 있는 파티션 안에서 자유와 해방을 남몰래 갈망하지만, 공공의 돌파구를 발견할 수 없는 현실 난관에 쉽사리 봉착하곤 한다. 그렇기 때문에 불안한 개인들은 문화 소비와 경쟁의 집단에 참여함으로써 진정한 개별을 끝내 쟁취하지 못한다. 신화에 갇힌 개별의 쓸쓸한 죽음이다.

영국의 신학자 콜린 건턴은 자신의 책 『하나, 여럿, 셋』에서 현대성의 비애를 말하며 로버트 피핀의 글을 인용한다. “현대성은 두려움 없고 호기심 많고 합리적이고 자립적인 개인들의 문화를 약속했지만, 그것이 낳은 것은 무리 사회, 즉 불안하고 소심하고 순응적인 양으로 이루어진 집단이었으며, 지극히 진부한 문화였다.” 건턴은 현대성이 ‘하나’에 대한 반발로 인해 ‘여럿’을 추구하다가, 의도하지 않은 역설, 곧 전체주의와 소비주의 문화로 흘러가 버렸다고 말한다.

 

작년 4분기 한국 출산율 수치는 0.65다. 우리 사회는 생명을 태동하기 어려운 공간이 되었다. 자율과 타율이 뒤섞인 복잡한 현상이기에, 이를 두고 간결한 평가를 내놓는 것은 무리한 일이다. 사안이 커다란 만큼 여러 영역에서 저출산 문제를 가지고 이 사회를 평가하는 말들이 들려온다. 어느 진화생물학자는 이 현상을 진화적 관점에서 바라보며, 우리 민족을 적응에 최적화된 민족으로 높이 평가하기도 한다.

또한 어느 환경학자는 지구 행성의 인구 수용 관점에서 이 문제에 접근하기도 한다. 일면 타당해 보이는 분석들로 인해 나는 잠시 논리적 안정감에 놓였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헛헛한 낭떠러지 아래로 미끄러지고 말았다. 우리의 실존은 누가 대변해 줄 것인가. 메커니즘의 정보 아래 놓인 인간에게 발언권이란 없다. ‘0.65’ 이 숫자는 나에게 의미를 주지 않는 빈 숫자다. 말 그대로 수치일 뿐이다. 처음 이 숫자를 대면한 나에게 든 생각은 하나뿐이었다. ‘우리는 담기지 않았구나.’ 이 숫자에 포함되지 않은 이들을 상상하며 일종의 동질감 같은 것을 느꼈다.

 

팬데믹의 위협을 기점으로 수없이 태동하고 사라진 신화들은 한국 사회 곳곳에 생채기를 남겼다. 부동산 투자의 늦은 열차를 탄 어느 부부의 이야기를 들었다. 몇 년 전, 그들은 적당한 지역에 아파트를 매입했고 가격이 오르면 대출금을 금방 청산할 수 있을 거라고 믿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매물 가치가 폭락했다. 그들은 끝을 알 수 없는 기나긴 버티기에 들어간 지 오래다. 이제는 한 사회 안에 막연한 신화들이 쉽게 작동하고 허무하게 몰락하고 있다는 사실을 많은 사람들이 체험적으로 알아차린 듯 보인다.

이러한 예측 불가능한 유동 사회를 통해 우리에게 켜켜이 쌓여 가는 감각은 다름 아닌 위험(risk)에 대한 불안이다. 실제로 현재 한국 사회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가능성이란 위험성을 뜻한다. 사실 가능성과 위험성의 상관관계는 어느 때고 동일했지만, 이 사회는 상대적으로 위험성이 극대화되고 가능성이 위축된 불균형한 극단적 공간이 되어 버렸다.

이곳은 과연 위험성을 통해 가능성으로 나아갈 수 있는 공간인가, 하는 질문이 드는 요즘이다. 무엇이 되었든 승차하면 하차할 수 없는 현실이다. 굉음이 날 정도의 속력으로 인해 하차하다가 크게 다친 사람을 많이 목격하기도 했고, 다시 올라탈 기회 자체를 놓칠 수 있다는 두려움이 커진 탓이기도 하다. 이러한 현실 안에 우리의 실존이 놓여 있다.

 

믿을 수 없는 공간, 의지할 이 없는 공간, 미지근한 공간을 살고 있는, 그래서 모두의 색채가 사라지는 우리의 삶이 반영된 수치가 ‘0.65’다. “인생은 독고다이”라는 말에 피상성을 넘어 잔혹성이 느껴진다. 위험에 처한 개인들을 더욱 위험한 영역으로 내모는 막연한 수사다. 모두가 놓여 있는 위험을 서로 끌어안아 줄 수 있는 공동체가 더 크게 말해져야 할 때다.

이러한 견해에 대해 여럿을 하나의 체계 안으로 포섭하거나 개별을 착취하는 방향성으로 이해한다면, 안타깝지만 그것은 트라우마에서 비롯한 슬픈 반응일 뿐이다. 여럿은 하나라는 의식으로 서로를 돌보아야 하고, 하나는 여럿으로 다채롭게 표현되어야 한다. 그리스도인들은 이러한 사회의 위기를 어떻게 평가해야 하는가. 만약 ‘0.65’라는 수치를 보며 단순히 기독교 인구 감소에 두려움만을 느낀다면 어김없이 우리는 미끄러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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