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드니 루맷 감독이 만든 '12인의 성난 사람들(12 Angry Men,1957년작)'은 법정 영화의 교과서다. 12인의 성난 사람들은 미국의 형사배심제도의 한계와 가능성을 동시에 보여주는 수작인데, 변변한 스팩터클도 없이 좁은 방 안에 모인 12명의 배심원 간의 대화로만 시종일관한다.
다양한 출신과 상이한 경험과 온갖 직업과 수다한 편견으로 무장한 배심원단은 아버지를 칼로 살해한 혐의로 기소된 소년에 대한 평결을 맡는다. 무더위가 기승을 부리는 방 안에 갇힌 배심원단에게 이 사건은 자명해 보였다. 검찰의 공소사실과 증거와 증언은 모두 소년의 패륜범죄를 입증하는 것 같았다. 만장일치제인 배심제의 특성상 배심원단은 거수로 소년의 유무죄에 대해 투표했다.
응당 만장일치가 나올 줄 알았지만, 오직 한 명의 배심원만이 소년이 무죄일 가능성을 제기하며 반대의견을 낸다. 나머지 배심원들은 소수의견을 낸 배심원에게 분노하거나 어처구니없어 한다. 심지어 얼른 평결을 끝내고 프로야구를 직관해야 한다는 배심원도 있다.
하지만 소수의견을 낸 배심원은 포기하거나 굴복하지 않고 소년이 범인이 아닐 가능성에 대해 합리적 의심을 줄기차게 제기한다. 소수의견을 낸 배심원의 거듭된 설득에 배심원들도 하나둘씩 설복되고 마침내 최후까지 소년의 유죄를 주장하던(그 배심원은 아들과의 사이가 완전히 파탄 난 아버지였다) 배심원마저 소년의 무죄에 동의한다. 배심원단은 만장일치로 소년을 무죄평결한다.
민주주의는 인민이 스스로 입법자이며, 법관이고, 행정가가 되는 제도
'12인의 성난 사람들'은 미국 형사배심제도의 위험성을 잘 보여준다. 무작위로 선발된 배심원들은 다양한 출신과 상이한 경험과 온갖 직업과 격차 큰 지적역량과 수다한 편견을 지니고 있기에 그릇된 평결을 내릴 가능성이 상존한다. 하지만 위대한 소수자가 그 안에 포함될 가능성도 얼마든지 있다. 그리고 위대한 소수자가 명료한 이성과 단단한 논리로 배심원들 안에 내재한 이성과 양심을 일으켜 세우자 배심원들은 합리적 의사결정을 내린다. '12인의 성난 사람들'이 미국 형사배심제도의 위대함에 주목한 지점이다.
나는 무엇보다 '12인의 성난 사람들'이 민주주의의 주권자가 스스로를 다스리는 과정을 그린 영화라고 생각한다. 민주주의란 주권자가 스스로를 다스리는 제도다. 즉 ‘인민의 자기지배’라는 말이다. 여기서 주권자가 스스로를 통치한다는 의미는 주권자가 입법자이고, 행정가이며, 법관이란 뜻이다.
'12인의 성난 사람들'은 법관이 된 주권자의 얼굴을 포착한 영화다. 그들은 일쑤 무관심하기도 하고 갖은 편견과 선입견에 사로잡혀 있기도 하고 우왕좌왕하기도 하지만 토론과 대화를 통해 스스로의 내면에 존재하는 이성과 윤리의 빛을 따라 어떤 직업 법관보다 공정하고 정의로운 평결을 내린다. 주권자가 사법시스템 안에서 스스로를 다스리며 주권자 노릇을 제대로 한 것이다.
사법 앞에서 완전히 멈춘 국민주권을 복원시켜야
이제 대한민국으로 돌아와 보자! 대한민국은 건국 이래 특히 사법의 영역에서는 사실상 주권자의 주권이 전혀 관철되거나 작동하지 않았다. 수사권은 경찰과 검찰이, 영장청구권과 기소권은 검찰이, 재판권은 법원이 각각 독점했으며 주권자가 관여하거나 잘못을 교정할 수단이나 장치나 경로는 전혀 없었다. 민주공화국의 주권자들은 그저 경찰과 검찰과 법원의 공명정대한 처분만을 바라는 신세였을 따름이다.
주권자의 권한을 위임받은 국가기관, 주권자의 세금으로 운영되고 녹봉을 받는 국가기관이 사법영역의 주인이 되고, 주권자들은 처분의 대상으로 전락한 결과가 바로 지금의 윤석열 정권이다. 대한민국의 사법시스템을 책임진 국가기관들은 마치 중세의 봉건영주처럼 행세하며 주권자들을 농노 취급 중이다. 국가기관 간 견제와 균형의 원칙이 무너진 건 오래이며, 국민의 기본권은 경찰과 검찰과 법원과 헌법재판소가 경쟁적으로 침해 중이다.
경찰과 검찰은 수사권과 기소권을 남용 중이고, 수사기관과 공소기관의 헌법 및 법률위반행위를 제어하고 주권자에 대한 기본권 침해에 단호히 대응해야 하는 법원은 영장자판기로 전락한데다 무죄추정의 원칙과 증거재판주의를 부인하는 것처럼 판결하며, 헌정질서 수호와 기본권 보장의 최후 보루 헌법재판소는 보복목적으로 공소권을 남용한 검사를 결사옹위하고 나섰다.
이건 사법시스템 전체의 붕괴이자 타락이라고 봐야 옳다. 일부 정치검사나 오염된 일부 법관의 문제로 치환하는 건 사태의 본질을 악의적으로 왜곡하는 것에 불과하다. 결국 관건이자 핵심은 주권자가 사법영역에서도 주권을 행사하고 스스로를 다스릴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수사권을 경찰과 검찰이, 영장청구권과 공소권을 검찰이, 재판권을 법원이 독점하고 주권자의 주권관철을 용납하지 않는 지금까지의 사법시스템을 근본적으로 혁파하지 않고는 대한민국에서 정의(인간세상에서 정의란 사법정의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의 실현은 영원히 불가능하다.
하여 우리는 제헌헌법 수준으로 헌법을 개정해 국민주권이 사법영역에서도 전방위적으로 관철되도록 해야 한다. 기관의 구성, 수사와 기소와 재판의 전 과정 등에 주권자들이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사법의 객체이자 대상이 아니라 주체로 우뚝 서야 한다. 그 과정에서 적지 않은 우여곡절과 수다한 시행착오가 있겠지만, 그런 우여곡절과 시행착오는 주권자가 사법영역에서 주권자가 되기 위해 마땅히 치러야 할 비용에 불과하다.
우리는 분명히 알아야 한다. 아무리 위대한 직업 검사이자 직업 법관이라도, 스스로가 검사가 되고 법관이 된 주권자보다 위대할 수는 없다는 사실을 말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