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사, 짭새, 경찰 그 오욕의 역사 그러나 안병하

안병하 치안감 최근 법원으로부터 강제 퇴직 인정

  • 기사입력 2025.05.28 11:08
  • 기자명 글벗

한국 사회에서 '경찰' 오랫동안 경멸의 이름으로 불렸다. 짭새, 순사, 백골단. 단어들은 단순한 욕설이 아니라, 권력에 복무해온 경찰제도의 오욕을 증언한다.

식민지배기, 순사(경찰) 제국주의 하수인이었다. 독립운동가들을 고문하던 악질 경찰이름으로 노덕술과 하판락은 해방 이후에도 건재했다. 친일 경찰이 청산되지 않았고, 독재정권 아래 경찰은 국민을 억압하는 도구로 쓰였다. '국민의 경찰'이라는 말은 현실과 너무 멀었다.

1950 한국전쟁 발발 , 경찰은 보도연맹 사건을 통해 민간인 대량 학살에 가담했다. 하지만 속에서도 구례경찰서장 안종삼은 다른 선택을 했다. 그는 중앙의 지시를 거부하고 수감자 480명을 풀어주었다. 죽이라는 명령 대신 살리겠다는 결단을 내린 것이다.

1980 5, 대한민국 광주는 역사의 격랑 속에 휩쓸렸다. 군부의 무자비한 폭력 앞에 시민들의 절규가 하늘을 찔렀고, 총칼 앞에 민주주의의 가치가 무참히 짓밟히는 듯했다. 그러나 암흑 속에서도 줄기 빛처럼 시민을 지키고자 했던 경찰이 있었다. 바로 당시 전라남도 경찰국장 안병하 치안감이다. 그의 이야기는 부당한 권력에 맞선 용기와 헌신, 그리고 진정한 경찰 정신이 무엇인지를 우리에게 묵직하게 일깨운다.

안병하 치안감의 삶은 일제강점기와 6.25 전쟁, 그리고 군부 독재라는 격동의 한국 근현대사를 관통한다. 가난한 어린 시절을 보냈지만 학업에 대한 열정으로 일본 유학까지 감행했으며, 6.25 전쟁에서는 육군 장교로 참전하여 화랑무공훈장을 받는 국가를 위한 헌신을 아끼지 않았다. 중령으로 전역 1962 경찰에 특채되면서 그의 삶은 새로운 전환점을 맞이한다.

경찰 생활을 시작하면서 그는 부패한 관행에 굴하지 않는 청렴함과 과감한 리더십을 보여주었다. 부산 중부경찰서장 시절에는 비리 장부를 불태워 과거의 잘못을 용서하고 통합의 리더십을 발휘했으며, 치안국 작전계장 시절에는 간첩선 침투 사건을 성공적으로 지휘하여 국가 안보에도 기여했다. 그의 이러한 행보는 훗날 5.18 민주화운동 당시 그가 보여준 투철한 시민 보호 정신의 뿌리가 된다.

1979 10.26 사건과 12.12 군사반란으로 신군부가 정권을 장악하자, 안병하 치안감이 부임하던 광주·전남 지역에서도 신군부에 반대하는 시위가 거세게 일어났다. 이때 치안감은 일선 전투경찰 기동대에게 공격 진압보다 방어진압을 우선하고, 시민들에게 돌멩이를 던지거나 도망가는 학생들을 뒤쫓지 말라고 지시하며 시민들의 안전을 최우선에 두었다. 이는 신군부의 강경 진압 명령과는 정면으로 배치되는, 오직 시민을 위한 결단이었다.

5 17 비상계엄이 확대되고 공수부대가 광주에 주둔하면서 5.18 민주화운동은 절정으로 치달았다. 신군부의 발포 명령에도 불구하고 치안감은 이를 단호히 거부하고 오히려 일선 경찰들의 총기를 회수할 것을 명령했다. 1960 4.19 혁명 당시 경찰에 의한 사상자가 발생했던 비극을 되풀이하지 않겠다는 굳은 의지였다. 그의 지휘 아래 전남 광주 지역 경찰들은 시민들과 충돌 없이 대처할 있었고, 오히려 계엄군의 폭력에 항의하다 구타당하는 경찰 간부까지 발생했다. 경찰과 시위대가 서로에게 고생한다며 인사를 나눌 만큼 우호적인 분위기가 형성된 것은 안병하 치안감의 확고한 신념과 리더십 덕분이었다.

1979년 안병하 전라남도 경찰국장(오른쪽)이 기동중대를 방문해 출동태세를 점검하고 있다. 안병하 평전 갈무리
1979년 안병하 전라남도 경찰국장(오른쪽)이 기동중대를 방문해 출동태세를 점검하고 있다. 안병하 평전 갈무리

 

특히 5 25, 당시 최규하 대통령 앞에서 이희성 계엄사령관이 "경찰이 무장하고 도청을 접수하라" 강경하게 명령했을 때도 치안감은경찰은 시민군에 형제, 가족도 있을 테고 이웃도 있는데 경찰이 무기를 사용하면서까지 없다" 끝까지 거절했다.

그러나 민주화운동이 계엄군에 의해 진압된 안병하 치안감에게는 혹독한 시련이 닥쳐왔다. 그는 보안사 요원들에게 연행되어 8 동안 끔찍한 고문을 당했고, 강압에 의해 사표를 제출하고 직위 해제되었다. 고문 후유증으로 인해 그는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 고통을 겪어야 했다. 그는 극심한 고통 속에서도 부하 경찰관들을 보호하고자 "부하들에게 책임을 묻지 않겠다" 조건으로 사표를 제출하며 마지막까지 부하들을 챙기는 책임감을 보여주었다.

안타깝게도 그는 고문 후유증으로 8년간 투병하다 1988 60세의 이른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생전에 철저히 청렴했던 그는 유족들에게 막대한 병원비 빚만을 남겼고, 집까지 팔아야 하는 상황에 처했다. 그의 명예회복을 위한 가족들의 노력은 오랜 시간 동안 외면당했다. 해방이후 엄청난 재산을 축적하며 91세까지 장수한 친일 경찰 하판락과 비교되는 지점이다.

1993 뒤늦게 5.18 관련자로 인정받고, 1994 그의 죽음이 고문으로 인한 '간접사인'임이 인정되면서 뒤늦게나마 국가로부터 보상금을 수령받았다. 그리고 2003 5.18 민주화유공자로 인정받았으며, 2005년에는 국립서울현충원에 안장되어 비로소 영원한 안식을 얻었다. 2015년에는 '이달의 호국인물' 선정되며 그의 숭고한 정신은 마침내 역사 속에 온전히 자리매김했다.

그러나 퇴직 시기를 놓고 유가족과 정부가 대립해서 재판이 다시 열렸다. 마침내 법원으로부터 강제 퇴직을 인정받았다. 안병하기념사업회는 22 서울행정법원 행정2부는 치안감 유족이 공무원연금공단을 상대로 제기한 공무원 퇴직연금 일시금 지급 결정 취소 소송 선고기일을 열어 유족의 손을 들어줬다”고 25 밝혔다. 하지만 지난 해 12.3의 밤 경찰 수뇌부는 다시 '짭새'가 되는 편에 서기로 결정했다.  

(서중석,김덕련 지음,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 16 - 광주항쟁, 한국 사회를 뒤흔든 시민 항쟁', 오월의봄)

꼬리를 무는 독서일기 지난 주제 :5.18 민주화 운동

꼬리를 무는 독서일기 이번 주제 :  경찰 안병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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