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전과 선동의 역사와 기독교
선전과 선동의 역사와 기독교
  • 글벗
  • 승인 2024.01.23 13: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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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꼬리를 무는 독서 일기) 포스터, 팜플렛, 삐라

최초의 영화 포스터는1895 12 26 파리의 그랜드 카페에서 열린  영화 L'Arroseur arrosé 상영을 홍보하기 위해 제작되었다. 당시에는  포스터가 해당 영화를 전시하는 극장에서만 사용할 있어서 상영이 끝나면 반환되었다고 한다. 이상의 선전효과는 의미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일 것이다.

최초의 영화 포스터
최초의 영화 포스터

최초의 한국영화인 1919년작 ‘의리적 구토’는 포스터 대신 신문에 소개글로만 광고를 실었다. 현재 전해지는 가장 오래된 포스터는 1924년작 아리랑이다.

포스터가 공개된 장소에서 벽에 붙은 채로 대중을 상대로 선전하는 것이라면 개개인에게 선전을 위해 전해졌던 팜플렛의 역사는 오래 되었다. 구텐베르크가 인쇄기를 발명한 것이 1448, 구텐베르크의 인쇄기술은 교회사와 깊은 인연을 맺는다. 양피지에 쓰인 성경대신 인쇄된 라틴어 성경이 보급되기 시작했고 면죄()부도 인쇄기로 했다. 1517 종교개혁이 일어나자  독일어 성경을 찍어내면서 종교 개혁이 연착륙 하는데 기여를 했다인쇄기의 발명 이후 독일을 비롯한 유럽 국가들의 문맹율은 현저히 낮아졌다.

문맹율이 낮아지자 선동의 수단인 팜플렛 인쇄가 늘어났다. 1600년부터 1715 사이에 2,200 이상의 팜플렛이 출판되었다헨리 8세는 팜플렛을 통하여 가톨릭을 떠나 영국 교회를 창립하는 것의 정당성을 선전했다. 이것의 연장으로 프랑스 개신교 위그노를 지원하기 위해 프랑스에 영국군에 대한 찬반 팜플렛이 돌았다. 영국 명예혁명과 프랑스 대혁명에도 팜플렛은 진영의 정당성을 선전하는 수단으로 사용되었다.

포스터와 팜플렛과 달리 삐라는 불특정 다수를 대상으로 마구 뿌려지는 선동 수단이다. 삐라는 본래 벽보를 뜻하는 영어 bill 일본어 표현 비라(ビラ) 소리로 변한 것이다. 우리 말로는 전단이 되고 영어로는 leaflet이다. 한국 전쟁이 일어나자 육군장군인 페이스(Frank Pace) 적을 종이(삐라) 묻으라” 했고 미국무부는 적군과 시민들에게 매일 장의 삐라가 전달되어야 한다 했다. 한국 전쟁 당시 뿌려진 삐라는 무려 25억장(40억장이라는 통계도 있다)이라고 한다. 이는 한반도를 스무번 뒤덮고 지구를 바퀴 돌고도 남는 양이었다. (이임하 지음, 적을 삐라로 묻어라, 철수와 영희)

선전 선동은 영국 최초의 팜플렛이 성공회의 출범을 정당화하는 의도였던 것처럼 기독교와 깊은 관련이 있다. 현대 교회에서 포스터는 거대 현수막 형태로 나타나고 삐라인지 팜플렛인지 모를 전도지는 '판촉물'과 함께 마구 살포된다. 유튜브와 각종 SNS, 한국 채팅 메신저 중 가장 인기있는 카카오는 첨단이 아니지만 첨단에 뒤처진 한국 교인들에게 가장 좋은 선전도구다. 자신들이 첨단의 선봉에 섰다는 착각과 함께.  

아이작 펑크(Issac Funk) 애덤 와그널스(Adam Wagnalls) 편찬한 사전에 보면 ‘선전(propaganda)’을 다음과 같이 정의하고 있다.

1. 해외 선교를 감독하는 추기경 모임; 교황 우르바누스 8세가 선교 사제의 교육을 목적으로 1627 로마에 설립한 선전대학; 포교 신학교

2. 원칙이나 제도를 보급하는 목적을 띠는 단체나 기구

3. 특정 견해나 방침과 관련해 대중의 지지를 끌어내기 위해 질서정연하게 전개되는 운동

4. 선전이 주창하는 주의  (에드워드 버네이스 지음, 강미경 옮김, 프로파간다, 공존)

1번이 종교와 관계된 점이 특이하다. 그래서인지 신학자 자끄 엘륄이   ‘선전’(자끄 엘륄 지음, 하태환 옮김,대장간)에는 ‘준수한 신앙과 불온한 선전의 동거라는 부제가 달려 있다. 자끄 엘륄은 교회를 통해 일어나는 선전 행위를 우려한다.

그리스도인들은 선전에 매몰되어 있기 때문에, 그들이 행할 수도 있는 , 한편으로 효율적이면서 다른 한편으로 그들의 기독교를 표현하는 것이 무엇인지 절대 모른다. 그래서 그들은 다양한 이유로 흔히는 조심성으로, 선전이 그들에게 제시하는 경향들 이런 경향이나 혹은 저런 경향에 동조할 따름이다. 그들 역시 선전의 파노라마를 생생한 정치 현실로 여기고, 허구적인 파노라마 속에서 기독교를 어디에 끼워 넣어야 모른다. 그래서 그들은 다른 사람들처럼 현혹되고, 이러한 현혹은 그들의 믿음에서 모든 중압감을 걷어 버린다. (자끄 엘륄, 선전)

자끄 엘륄이 지금의 현실을 보고 말하는 같다. 교회를 통해 전파되는 각종 선전과 선동에는 차별과 혐오가 만연하고, 언어로 거짓을 생산한다. 얼마 대화방 메시지를 통해 교회 폐지법을 발의했다는 의원들의 명단이 허구적인 파노라마처럼 전달되었다. 게다가 누군가는 나에게 그것이 사실이냐고 물어 왔다. 최상위 법인 헌법에 종교의 자유가 보장되어 있는데 어떻게 그런 선전(선동) 속아 넘어갈까? 안타깝게도 그것이 한국 교회의 현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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