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나깨나 목사 조심
자나깨나 목사 조심
  • 지성수 목사
  • 승인 2023.03.29 1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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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란인 사도행전(20)

3년 동안 아둘람공동체에 다양한 사람들이 모여서 신앙의 스펙트럼이 매우 넓어졌다.
흔히 기독교인들은 자신과 신앙이 다른 것을 견디지 못하는 더러운 성향이 있는데 아둘람에서는 그런 증세는 용납이 안된다. 그래서 은사파에서 유물론적 신앙고백까지 다양한 신앙이 공존할 수 있는 것이다.
즉 누가 내가 믿는 신앙과 다른 소리를 해도 반대나 비판을 하지 않고 들어줄 수 있는 수준이 되었다는 것이다.

이런 면에서 가장 힘든 사람들이 목사들이다. 아둘람에서는 가끔 목사들이 와서 이상한 소리를 해서 급기야는 농담이지만 "자나깨나 목사 조심!"이라는 표어가 생겼다. 그래서 나는 거기에 한 가지를 덧붙여 "꺼진 불도 다시 보자"는 불조심 표어를 패러디해서 "목사 였던 사람도 조심" 하자고 했다.

아둘람의 다음 단계는 다원성을 수용하는 것이다. 같은 차원에서 다른 모습을 가지는 것을 다양성이라고 할 수 있다면 차원 자체가 다를 경우는 다원성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사물은 각기 적절한 차원 속에 존재한다. 아마존 정글에 사는 사람과 고도의 산업사회에 사는 사람이 같은 사고를 가질 수가 없다. 이처럼 자신이 물질적으로는 후기산업사회에 살고 정신문화적으로는 포스트모던 사회에 살고 있는 것을 느끼는 사람과 그런 현실을 체감하지 못하는 사람과는 같은 사고의 틀을 가질 수 없는 것이다. 여기서 차원은 높고 낮음의 의미가 아니다. 즉 dimension 은 位階가 아니고 層次인 것이다.
예를 들어 개인적 사고와 공동체적 사고는 다양성의 문제가 아니고 차원의 문제이다.

한 번은 장애인 학교 운동회를 참관하게 되었는데 달리기를 하는 동안 보통 학교 운동회처럼 서로가 남보다 빨리 달리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장애아들이 연실 뒤를 돌아 보면서 뒤에 쳐진 친구에게 “빨리 와! 빨리!”를 독촉했다.
그 모습을 보고 많은 학부모들이 배꼽을 잡으면서도 눈물을 흘렸다. 왜냐하면 죽자고 앞만 보고 달려도 자칫하면 경쟁에 뒤쳐질 수가 있는 각박한 세상에서 그들은 뒤에 쳐진 친구들을 걱정하는 천사의 모습을 연출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들이 살고 있는 세상은 경쟁의 의식이 없는 세상인 것이다.
차원은 바로 이런 것이다.

인간에 대하여 오해가 생겼을 때는 인간들끼리 대립, 갈등, 대화로 풀면 된다. 그런데 신에 대하여 오해를 하면 어떻게 되나?
신은 아무 말이 없기 때문에 인간들이 알아서 해결해야 할 수 밖에 없는데
인간들은 신에 대하여 같은 이해를 하는 사람들끼리 뭉쳐서 다르게 이해하는 사람들과 대립 했다.
그것이 종교전쟁의 역사이고 지금도 중동에서 벌어지는 이슬람의 수니파와 시아파의 갈등처럼 크고 작은 갈등을 계속하고 있다.

다른 한 가지는 인간들은 신과 자기 개인과의 관계에서 규정짓기를 좋아한다.
그러나 신은 보편적이어야 한다. 흔히들 하나님은 사랑이라고 한다. 그러나 한 순간에 4만 명 이상이 사망한 트루키에의 지진을 보라. 보편성의 원칙에 위배되는 것 아닌가?
나는 다석을 알고 서구의 신학 논리에 흥미가 없어졌다. 나에게 다석의 의미는 동양적 사고로의 전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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