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의 정치학
예수의 정치학
  • 최병인 편집장
  • 승인 2023.11.14 15: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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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은 갈릴리 맞은 편에 있는 거라사 지방에 닿았다. 예수께서 뭍에 내리시니, 그 마을 출신으로서 귀신 들린 사람 하나가 예수를 만났다. 그는 오랫동안 옷을 입지 않은 채, 집에서 살지 않고, 무덤에서 지내고 있었다. 그가 예수를 보고, 소리를 지르고서, 그 앞에 엎드려서, 큰 소리로 말하였다. “더없이 높으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 당신이 나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제발 나를 괴롭히지 마십시오.” 예수께서 이미 악한 귀신더러 그 사람에게서 나가라고 명하셨던 것이다. 귀신이 여러 번 그 사람을 붙잡았기 때문에, 사람들이 그를 쇠사슬과 쇠고랑으로 묶어서 감시하였으나, 그는 그것을 끊고, 귀신에게 몰려서 광야로 뛰쳐나가곤 하였다. 예수께서 그에게 물으셨다. “네 이름이 무엇이냐?” 그가 대답하였다. “군대입니다.” 많은 귀신이 그 사람 속에 들어가 있었기 때문이다. 귀신들은 자기들을 지옥에 보내지 말아 달라고 예수께 간청하였다. 마침 그곳 산기슭에, 놓아 기르는 큰 돼지 떼가 있었다. 귀신들은 자기들을 그 돼지들 속으로 들어가게 허락해 달라고 예수께 간청하였다. 예수께서 허락하시니, 귀신들이 그 사람에게서 나와서, 돼지들 속으로 들어갔다. 그래서 그 돼지 떼는 비탈을 내리달아서 호수에 빠져서 죽었다. 돼지를 치던 사람들이 이 일을 보고, 도망가서 읍내와 촌에 알렸다. 그래서 사람들이 일어난 그 일을 보러 나왔다. 그들은 예수께로 와서, 귀신들이 나가 버린 그 사람이 옷을 입고 제정신이 들어서 예수의 발 앞에 앉아 있는 것을 보고, 두려워하였다. 처음부터 지켜본 사람들이, 귀신 들렸던 사람이 어떻게 해서 낫게 되었는가를 그들에게 알려 주었다. 그러자 거라사 주위의 고을 주민들은 모두 예수께, 자기들에게서 떠나 달라고 간청하였다. 그들이 큰 두려움에 사로잡혔기 때문이다…. 누가복음 8:26-37

갈릴리 바다 남동쪽에 위치한 거라사, 그 지역 이름의 히브리어 어근은 ‘가라쉬’로서 ‘축출하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갈릴리 동쪽 지역에는 유대인이 살긴 했지만 주로 이방인이 거주했다. 이곳에 귀신 들린 사람이 있었는데 그는 예수를 만났을 때 “더없이 높으신 하나님의 아들υἱὲ τοῦ θεοῦ τοῦ ὑψίστου”이라는 칭호를 사용했다. 이는 유대 종교뿐만 아니라 헬라 종교에서 주피터(제우스)를 칭할 때 사용했던 표현이다. 그렇기 때문에 귀신에 사로잡힌 이 사람은 단순히 유대교적 맥락에서 여호와 하나님을 알아차렸다기보다 이방인의 맥락, 곧 로마 제국의 맥락에서 하나님을 인식하고 그것을 매우 자연스럽게 표출한 것이다. 그러니까 이 본문은 더없이 높으신 하나님의 아들이 군대라고 불리는 악령 무리를 축출한 사건이라고 볼 수 있다.

나는 이 강렬한 서사를 프랑스의 인류학자인 르네 지라르의 희생양 이론의 관점에서 읽었고, 이에 더해 로마 제국에 대한 예수의 대항적 메시지를 본문에서 읽어 낼 수 있었다. 거라사의 귀신 들린 사람 이야기에는 두 가지 흐름이 있다. 악령들의 이야기와 인간들의 이야기다. 영의 원리와 육의 원리가 복잡하게 얽히고설켜 있다. 국내에서 ⟨잠⟩이라는 미스터리 영화가 상영하고 있는데, 이 작품은 관객들이 귀신 들림과 몽유병 사이에서 사태를 진단할 수 없도록 답답한 혼란을 만들어 낸다. 넷플릭스에서도 신작 ⟨엑소시스트: 더 바티칸⟩이 개봉했는데, 이 영화는 실제로 바티칸에서 수석 퇴마사로 일했던 가브리엘 아모스 신부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인상적인 장면은 엑소시즘에 대한 교황청 성직자들의 서로 다른 입장이 담긴 토론 현장이다. 귀신 들림 현상을 겪고 있는 사람을 전통적 시각에서 구마 사역의 대상으로 볼 것인가, 아니면 정신 질환의 한 형태로 볼 것인가, 하는 게 논점이다. 인간의 총체성을 이해했을 때, 영과 육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에 놓인다.

거라사의 귀신 들린 사람 이야기에는 하늘의 악과 땅의 악이 한데 어우러진 그곳에서 곤경을 겪는 불쌍한 한 인간과, 하늘과 땅의 악을 내쫓고 해방을 선포하는 예수가 등장한다. 예수를 실은 배는 거라사 지방에 정박했고, 예수는 한 마을로 들어선다. 그곳에는 악한 귀신에 사로잡힌 사람이 있었다. 그는 그 마을 출신이었다고 누가는 기록한다. 그는 벌거벗은 채, 집이 아닌 무덤에서 살아가고 있었다. 그러니까 그는 죽음과 가까운 곳에 있었던 것이다. 그의 몸에는 쇠사슬과 쇠고랑이 뒤엉켜 있었다. 본문은 그 마을 사람들이 귀신 들린 사람을 묶어 두고서 그를 감시하고 있었다고 의미심장한 증언을 한다. 예수는 귀신 들린 사람에게 다가가 그 사람에게서 나가라고 명한다. 그러자 귀신은 반응한다. “더없이 높으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 당신이 나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예수는 반문한다. “네 이름이 무엇이냐?” 귀신은 답한다. “군대입니다.” 여기서 군대는 로마 제국의 군사 용어 레기온λεγιὼν으로서 약 4,000명 정도 되는 군단을 의미한다. 귀신 무리는 자신들을 지옥으로 보내지 말고 돼지 떼로 들어가게 해 달라고 예수에게 요청한다. 예수는 이 요청을 허락했고, 귀신 무리는 돼지 떼로 들어가 바다로 내달리게 하여 몰살시키고 만다. 이 현장을 목격한 돼지를 치던 사람들은 마을로 도망가서 자신들이 본 것을 말했고, 마을 사람들은 하나같이 현장으로 몰려들었다. 현장에 남아 있던 사람은 두 사람, 곧 예수와 귀신에게서 해방을 얻은 자였다. 오랫동안 악령에게 사로잡혔던 사람은 옷을 입고 정신을 차린 채 예수의 발 앞에 앉아 있었다. 그런데 누가는 마을 사람들이 그 현장을 목격하고 두려움에 떨었다고 기록한다. 심지어 큰 두려움에 떨며 예수에게 자신들의 마을을 떠나 달라고 간청하기까지 한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하다. 마을 사람들은 이 놀라운 해방의 현장을 왜 두려워했을까. 여기에 ‘은폐된 진실’이 있다고 르네 지라르는 말한다. 그는 귀신 들린 사람이 이 마을 공동체의 희생양이었다고 주장한다. 오랫동안 인류는 공동체 내부의 위기를 잠재우기 위해 희생양을 만들었다. 큰 폭력을 감추고 예방하기 위해 작은 폭력을 공동체가 합의하여 창출해 내는 방식이 바로 희생양 메커니즘이다. 이는 무고한 피를 흘려 벌 받아야 할 피를 감추는 공동체적 범죄다. 악한 일을 일삼고 은폐하려는 공동체는 꾸준히 희생양으로 적합한 대상을 찾아 나선다. 역사 속에서 희생양은 언제나 사회의 가장자리에 있는 사람들이었다. 공동체 안에 있지만, 그렇다고 확실하게 공동체를 누리고 있다고 말할 수 없는 힘없는 사람들이 희생양에 적합했다. 고대에는 어린아이들이 희생양이었고, 중세에는 마녀라는 누명을 가진 여성들이 희생양이었으며, 근대 유럽에서는 유대인들이 희생양이었다. 현대에도 희생양이 되기에 적합한 조건에 놓인 수많은 사람들이 그 자리로 내몰리고 있다. 물론 예수도 희생양 메커니즘의 한가운데서 죽음을 맞이했다. 거라사 주위의 마을 사람들은 쇠사슬과 쇠고랑으로 귀신 들린 사람을 무덤가에 단단히 묶어 놓고 감시했다. 귀신은 여러 번 사슬을 끊고 숙주를 마을 바깥으로 데리고 나갔고, 마을 사람들은 귀신 들린 사람을 매번 희생양의 자리, 곧 죽음의 자리로 데리고 와 결박했다. 희생양은 필연 공동체에서 추방을 당해야 하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이는 귀신과 인간의 합작을 보여 준다.

그렇다면 마을 사람들이 두려워했던 이유, 곧 은폐하려 한 진실은 무엇이었을까. 분명 확실하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본문은 거의 확실한 맥락을 드러낸다. 군대와 돼지. 군대, 레기온λεγιὼν은 로마 제국의 평화Pax Romana가 감추고 있는 헤게모니의 실체다. 로마 제국이 자신의 광범위한 국경을 보존하고 더욱 넓히는 데 사용한 수단은 화해와 협력이 아닌 지배와 무력이었다. 피식민지 팔레스타인의 모든 고을의 생존은 제국의 질서에 협조할 것인가, 협조하지 않을 것인가, 하는 문제에 달려 있었다. 이러한 맥락에서 본문 속 마을 공동체가 돼지 가축업에 종사했다는 사실은 이 마을 전체가 로마 제국에게 긴밀하게 협력했다는 사실을 뒷받침해 준다. 오늘날에도 유대인들은 돼지를 식탁에 올리지 않을 정도로 수천 년 동안 돼지에 대한 부정적 감정을 가지고 있다. 율법이 돼지를 부정한 동물로 규정하기 때문이다. 반면 로마인들의 삶에서 돼지는 일상이었다. 로마인들의 식탁에는 언제나 돼지고기가 올라왔고, 돼지는 로마 제국 종교의 제물이었다. 유대인들에게 돼지는 적의 식사였다. 그러니까 귀신 들린 사람이 살던 마을 공동체는 로마 제국의 문화, 경제, 종교 시스템에 기대어 자본을 축적하고 있었다고 예상할 수 있다. 거대 제국의 식민주의에 동조하는 마을. 어느 날, 그 마을의 한 사람이 귀신에 사로잡혔는데, 그 귀신의 이름이 ‘레기온’이었던 것이다. 마을 사람들은 귀신 들린 사람을 무덤가로 내몰아 자신들의 공동체적 죄를 은폐했다.

예수는 귀신에 사로잡힌 사람을 해방했고 마을 사람들은 큰 두려움에 사로잡혔다. 은폐된 악이 모조리 폭로되었다. 나는 이 본문에서 예수의 정치학을 발견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예수는 제국에도, 레기온에도, 돼지에도 첫 번째 시선을 두지 않았다. 그의 눈에 가장 먼저 들어온 대상은 오직 귀신에 사로잡힌 ‘사람’이었다. 사람을 구원하려는 마음과 행동이 은폐된 죄악을 스스로 폭로하게 만들었다.

그는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다. 모든 것이 그로 말미암아 창조되었으니, 그가 없이 창조된 것은 하나도 없다. 창조된 것은 그에게서 생명을 얻었으니, 그 생명은 사람의 빛이었다. 그 빛이 어둠 속에 비치니, 어둠이 그 빛을 이기지 못하였다 요한복음 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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