낯섦의 사랑
낯섦의 사랑
  • 최병인 편집장
  • 승인 2023.10.11 04: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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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령 누군가 나는 보라색을 좋아해, 라고 말한다면 문제가 되지 않는다. 문제를 일으키는 건 이 세상은 온통 보라색이야, 라고 말하는 사람이다. 더구나 보라색에 매료된 그 사람이 힘이 센 사람이라면 노란색을 좋아하거나 초록색을 좋아하는 사람은 침묵을 선택할 수밖에 없다. 소외의 대상은 비단 사람만이 아니다. 푸르무레한 들꽃도, 타들어 가는 낙엽목도, 울긋불긋한 옷을 입은 우리집 고양이 가을이도 단번에 무색의 미지근한 존재가 되고 만다. 살면서 문득 서늘함이 나의 마음에 휘몰아칠 때가 있는데 그건 내 주변에 낯선 존재가 더 이상 없음을 알아차릴 때다. 일정한 공간, 일, 사람 곁에서 일어나는 안정감은 때로 불안감을 일으킨다. 약소한 내가 광활한 생명을 품는 망망대해가 될 수 없음을 모르는 바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경계를 넘어서지 않는 삶의 태도가 속 편한 건 아니다. 죄를 지은 첫 사람 아담에게 하나님은 네가 어디 있느냐, 라고 물었다. 이따금 말의 겉뜻은 무참한 속뜻을 가리기 위한 발신자의 배려이기도 하다. 자발적 소외를 선택한 아담이 직시하고 탈피해야 했던 건 다름 아닌 그의 작디작은 공간이었을 테다.

얼마 전, 환상문학을 왜 좋아하느냐는 물음을 받았다. 환상문학에 대한 나의 끌림은 초현실을 향한 단순한 도피 욕구에서 비롯한 것일까. 구태여 부정하고 싶지는 않다. 하지만 조금 더 정확하게 말하면 나의 환상문학에 대한 애정은 벗어나기 위함일뿐더러, 들어가기 위함이다. 현실에서 초현실로. 아니, 나의 정상성 너머에 있는 또 다른 정상성을 향한 도전이다. 톨킨의 〈호빗〉을 즐겁게 읽고 있다. 드워프, 요정, 고블린, 인간 등 여러 정상성이 협력, 충돌하며 중간계의 평화가 위태롭게 유지된다. 가장 인상적인 장면은 드워프 킬리와 요정 타우리엘이 사랑에 빠지는 모습이다. 그 둘은 자신을 형성한 사회가 강요한 정상성의 신화를 깨뜨리려고 몸부림치는 아름다운 존재들이다. 엇비슷한 이야기지만, 사진학을 공부하며 매료된 작가가 있는데 그녀는 다이안 아버스다. 중형 핫셀블라드를 목에 메고 변두리를 거닐던 그녀가 촬영한 피사체는 퀴어다. 뉴욕이라는 현실에서는 도통 만날 수 없는 초현실에 사는 사람들. 그들은 주류 사회가 정한 정상성의 범주에 들어오지 못하여 밀려난 또 다른 정상성의 사람들이다. 초연결사회라고 불리는 세상이 꾸준히 의심스럽다. 우리는 정말 연결되어 있는 것일까.

사람은 그가 살아온 정황에 의해 형성된다. 정황은 마치 음식물과 같아서 먹은 대로 살이 되고 마신 대로 피가 된다. 사람은 정황의 유기체다. 그렇기 때문에 한 사람과 관계하는 일은 전대미문의 사건이다. 동일한 정황을 섭취한 사람은 없기에, 동일한 만남도 없는 법이다. 시인 정현종은 이렇게 썼다. “사람이 온다는 건 실로 어마어마한 일이다. 그는 그의 과거와 현재와 그리고 그의 미래와 함께 오기 때문이다.” 그렇게 우리는 서로에게 필연 낯선 존재일 수밖에 없다. 

낯섦은 익숙의 반대다. 이 반대는 위치와 방향 따위가 서로 맞서는 반대가 아닌, 행동이나 견해 따위에 대한 거스름으로서의 반대다. 낯섦은 익숙을 거스른다. 낯섦은 타인을 발견할 때 경험하는 감정이며, 익숙은 타인에게서 자신을 발견할 때 경험하는 감정이다. 어느 날 아내로부터 낯설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서운하면서도 기뻤다. 그녀가 나를 낯설게 느낀 것은 나로부터 그녀 자신을 발견하지 못했다는 것이기에 서운했고, 동시에 그녀가 나를 진정 존중하고 있다는 것이기에 기뻤다. 연인의 이별은 낯설어진 탓보다는 익숙해진 탓에 일어난다. 인간이란 얼마나 모순적이고 부조리한 존재인가. 낯설어 끌리고, 익숙해져 떠난다. 익숙의 사랑은 낯선 이를 모색하여 그를 익숙한 이로 만든다. 반면 낯섦의 사랑은 낯선 이를 끝까지 낯선 이로 보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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