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쓰러뜨리소서
나를 쓰러뜨리소서
  • 최병인 편집장
  • 승인 2023.09.12 23: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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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야곱을 야비한 인물로 묘사하곤 한다. 그가 술수와 잔머리에 기대어 인생을 살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반은 맞고, 반은 틀린 말이라고 생각한다. 비록 그는 장자권을 얻기 위해 형 에서와 아버지 이삭을 속여 도망자 신세가 되기도 했지만 말이다. 하지만 그것은 간절함에서 비롯한 일이었다. 아무 노력 없이 장자의 권리를 가지고 태어난 에서는 정작 그 복된 권리에 관심이 없었다. 심지어 그 명분을 팥죽 한 그릇과 맞바꿀 정도로 에서는 자신이 누리는 호사를 가볍게 여겼다. 우유부단한 에서의 동생 야곱은 간절했다.

이 사건의 발단으로 야곱은 가족의 품을 떠나게 된다. 삼촌 라반의 집에 기거하게 되는데, 그곳에서 야곱은 라헬을 만난다. 그녀를 사랑하게 된 야곱은 라헬을 얻기 위해 무려 14년 동안 노동의 대가를 치른다. 야곱의 이러한 모습들을 볼 때, 나는 도무지 야곱을 얍삽한 사람으로 볼 수 없었다. 그의 잘못을 굳이 꼽으라면, 그는 욕심이 많은 사람이었다. 나에게 야곱이란 인물은 절박한 사람이다.

그는 자신의 삶을 자연의 흐름에 맡기는 법을 알지 못했던 사람이다. 잠자코 있으면 아무것도 얻어낼 수 없는 사람, 의지를 내세우지 않으면 아무도 알아봐 주지 않는 사람. 야곱은 쉴 새 없이 살았다. 그렇다고 해서 인간의 절박함이 아름답기만 한가. 그렇지만은 않다. 절박함의 깊이는 자기 몰입의 깊이와 관련이 있기 때문이다. 인간은 절박할수록 자신 이외의 것들을 배제하는 경향성을 갖는다. 그것이 환경이든, 이웃이든, 신앙이든 말이다.

얍복 강에서의 야곱을 묵상할 때마다 나는 동질감과 이질감을 동시에 느끼며, 그의 신앙을 동경하곤 한다. 아무도 부여하지 않은 삶의 무게에 짓눌린 그에게서 동질감을, 그 짐을 끝내 하나님 앞에 내려놓은 그에게서 이질감을 느낀다. 야곱은 끝내 형 에서를 만나러 간다. 야곱은 형이 자신을 죽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전략가이자, 책략가였던 야곱은 에서를 설득하기 위해 예물을 여러 묶음으로 분리했다. 하나씩 전달하여 에서의 화를 풀려는 계획이었다.

모든 준비가 끝났다. 한밤중에 야곱은 가족을 모두 보내 놓고, 홀로 남아 얍복 강가로 향한다. 이 장면에는 구원 받은 인간의 실존이 담겨 있다. 야곱이 드디어 무거운 짐을 내려놓았기 때문이다. 야곱의 인생은 무언가를 선택하고, 그에 따른 책임을 지며, 끝없이 주체적인 결정을 하는 인생이었다. 그렇게 얍복 강까지 온 것이다. 야곱은 어떤 미상의 존재와 씨름을 한다.

그리고 그에게 이렇게 말한다. “당신이 내게 축복하지 아니하면 가게 하지 아니하겠나이다.” 이 야곱의 말은 매우 의미심장하다. 야곱은 처음으로 자신을 목적어에 둔다. 그는 언제나 능동적으로 복을 쟁취했던 사람이다. 복을 얻어 낸 야곱은 항상 주어의 자리에 있었다. 하지만 얍복 강에서의 야곱은 가만히 버틴다. 또다시 자신이 주어의 자리에 가지 않게 해 달라고 버틴다.

역설적이지만, 야곱은 지기 위해 씨름을 했다. 그만 좀 이기고 싶어서, 그만 좀 책임을 지고 싶어서 하나님과 씨름을 한 것이다. 그의 간절함 때문인지, 하나님은 그를 쳐서 쓰러뜨렸다. 그러고는 야곱이 이겼다고 말씀해 주신다. 야곱은 처참하게 졌지만, 하나님은 그를 이겼다고 말씀해 주셨다. 어른이 되어 가며, 주체적인 삶에 더욱더 익숙해져 가는 것 같다. 하지만 하나님 앞에서만큼은 그 피로를 내려놓고 싶다. 복음서에 나오는 예수님의 말씀에 공명을 느낀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마태복음 1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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