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중직, 유령에서 사람으로.
이중직, 유령에서 사람으로.
  • 최병인 편집장
  • 승인 2023.07.07 07:44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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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중직을 나의 가야 할 길로 확신한 건 신학과 학부 2학년, 스물한 살 때다. 종교 배경이 없는 가정에서 자란 나는 목사의 삶을 잘 모른 채 신학교에 입학했다. 목사의 종교적 역할은 막연하게 알았지만 목사직이 교회와 사회 안에서 어떻게 유지되는지는 알지 못했다.

신학교 첫 학기가 시작하자마자 나는 움츠러들었다. 각 교단과 지역에 따라서 신학생들은 무리를 지었다. 강의실에서 어느 교수님은 1학년 학생에게 아버지의 근황을 묻기도 했다. 다들 서로를 잘 알고 있는 듯 보였다. 가장 힘들었던 것은 그들이 공유하는 언어에 참여하지 못하는 내 모습이었다. 서울의 어느 교회, 어느 목사님, 어느 교단. 도통 이해할 수 없고 공감할 수 없는 말들이었다. 비신자 부모님을 간신히 설득해서 입학한 신학교인데 나는 신학교 생활에 최선을 다하지 못했다. 당장이라도 도망가고 싶었지만, 혹시 나의 올곧지 못한 모습이 부모님에게 신앙의 걸림돌이 되지는 않을까 하여 참고 버텼다.

 

첫 학기는 다행히 학사 경고를 면할 정도의 성적으로 종강을 했다. 그리고 둘째 학기 때는 친구들을 몇몇 사귈 수 있었다. 모두 나와 비슷한 처지의 아이들이었다. 하나님이 좋고 교회가 좋아서 신학교에 입학한 무지렁이들이었다. 우리는 학교 수업을 간신히 듣고 운동장으로 가서 축구를 하거나 강으로 나가 낚시를 하기 바빴다. 방학이 되면 전국을 유랑하며 청소년 캠프들을 섬겼다. 캠프를 주관하는 선교 단체들은 교통비를 지원해 주지 않았기 때문에 일용직 아르바이트를 통해 교통비를 벌었다. 개강이 다가오면 가장 먼저 호기롭게 학자금 대출을 신청했고 우울하게 신학교 기숙사에 들어갈 준비를 했다.

2학년이 되자 학생들이 하나둘 전도사로 사역을 하기 시작했다. 한 선배가 강의실에 앉아 있는 나에게 왜 3월인데 아직도 사역지를 안 알아보는지 물었다. 그때 나는 교회에 사역자로 들어가는 절차가 무엇인지 알지 못했다. 선배는 나에게 갓피플 사역자 청빙 게시판을 알려주었고 그날 나는 하루 종일 웹사이트를 들락날락하며 스크롤했다. 게시글은 꽤 많았다. 내가 들어갈 수 있는 교회들이 이토록 많다는 사실이 신기했고 약간의 안도감이 생기기도 했다.

거의 매일 게시판을 확인하며 내가 가고 싶은, 혹은 갈 만한 교회들을 고르고 살펴봤다. 며칠 뒤, 학교 카페에서 학과 동기들과 대화를 하게 되었다. 나는 요즘 근황을 나누다가 동기들에게 갓피플을 신나게 전파했다. 몇몇은 관심을 가지고 나의 이야기를 들었지만, 몇몇은 시큰둥했다. 나는 시큰둥한 동기들이 사역에 관심이 없구나, 하며 그 시간을 흘려보냈다. 알고 보니 그 시큰둥한 동기들은 모두 자신의 모교, 곧 아버지의 교회에서 이미 사역을 하고 있었다. 나중에 그 이야기를 듣고는 괜히 부끄러운 마음이 들었다.

나를 비롯한 무지렁이 공동체는 꾸준한 사역지 실패를 맛봤다. 담임 목사님의 생일을 챙기지 않아 결국 해고를 당한 놈, 면허가 1종 보통이 아니라는 이유로 출근 첫날 계약 파기를 당한 놈, 새벽 예배 때 졸아서 조인트를 맞은 놈. 연고 없는 우리는 점점 갓피플 철새가 되어 갔다. 다행히 우리는 사역을 마친 매주일 저녁 자취방에 모여서 신나게 놀며 서로를 위로했다.

그러다가 줄곧 기타를 꺼내 함께 찬양을 하고 소박한 기도회를 열었다. 가장 두려웠던 것은 우리 안에 차곡차곡 쌓여 가는 교회에 대한 냉소와 미움이었다. 신학교에 오지 않았더라면 어땠을까, 하는 초라한 생각이 들기도 했다. 꾸준한 딜레마에 놓였다. 교회를 사랑하기로 하면 나를 잃었고, 나를 지키기로 하면 교회는 나를 버렸다. 무엇이 잘못된 것일까, 하는 불안한 고민에 한동안 잠겨 있었다.

이 시기에 사랑하고 존경하는 선배 사역자가 마흔의 나이에 교회에서 불합리한 해고를 당했다. 사역자에게 교회의 의미는 삶의 공동체이자 경제적 기반이다. 그분은 한순간에 가족과 직장을 잃었다. 다음달 월급 중단은 물론 퇴직금도 없다. 사회 보장 시스템 바깥에 있으니 급한 실업 급여도 받을 수 없으며 훗날 연금 또한 존재하지 않는다. 철새는 공동체라도 있지 사역자는 유령이다. 그분은 교회에 채용을 받기 어려운 나이에 실직했고, 다시 채용을 받는다 하더라도 재차 이런 방식으로 해고를 당하면, 그때는 더욱 막막한 상황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나는 그때 이중직을 결정했다. 도무지 목회자가 되는 것은 포기할 수 없었다. 가장 사랑하는 일을 해야만 했다. 한국 개신교 사역자가 처한 경제 환경은 사회 보장이 없는 시장 체제다. 생존을 가능하게 하는 사적 인프라를 가지고 있거나, 개인의 역량으로 살아 남거나, 그 두 가지 경로뿐이다. 최근 들어 4대보험을 가입해 주는 소수의 교회가 있긴 하지만, 한국 개신교에는 실제로 작동하는 공공의 최소 경제 울타리가 아직 없다.

이는 어쩌면 자유의 종교인 개신교의 최대 폐단이다. 이러한 파편화된 시스템으로 성령의 공동체라고 하는 교회가 가능하기는 한 걸까, 하는 의문이 사라지지 않았다. 그래서 교회의 형태에 대한 질문을 가지기 시작했다. 내가 자발적으로 헌신한 직책이 갖는 어려움 때문에 교회의 옳고 그름을 논하는 것이 못내 불편했다. 이중직을 말하는 것에도 일말의 죄책감이 있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내가 교회와 사역자의 관계를 잘못 설정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사역자는 교회를 ‘위한 존재’이기 전에 교회가 ‘필요한 존재’라는 사실을 서서히 깨닫게 되었다. 내가 교회를 그토록 세우고 섬기고 싶었던 이유는 다름 아닌 교회를 절실히 원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어느 순간 나는 사역자가 기능인으로서 존재하는 세계에 들어와 버렸다. 끝내 교회의 가족이 될 수 없는 시스템이었다. 과정에서 의미를 찾으라는 말은 격려일 뿐 진짜 해결책은 아니었다. 성원권을 얻은 사람이 된 듯 기뻐하다가도 무색하게 유령으로 전락했다. 그래서 나는 교회를 더욱 적극적이고 자유롭게 갈망하기 시작했다. 사역자가 소외되고 소비되는 교회가 아닌 이 땅을 함께 살아갈 지속가능한 가족 공동체를 바랐다. 그래서 일하는 목회자가 되는 것이 첫 번째이자 마지막 과제가 된 것이다.

최근 이중직에 대한 어느 유명 목사님의 발언이 화제가 되었다. 나는 그분의 말에 의미값이 아예 없다고 생각했다. 교회론을 논하지 않고 이중직 자체의 가부만을 따지는 건 지지부진한 토론을 낳는 절차가 어긋난 생각이다.

교회는 무엇인가, 라는 질문에 대한 답변에서 이중직의 가능성이 파생한다. 교회를 생산자인 사역자와 소비자인 평신도의 조직체로 구성했다면 이중직은 기능적으로 불가능하다. 하지만 교회를 생산자와 소비자가 따로 구분되지 않는 멤버쉽 형태의 조직체로 구성한다면 이중직은 가능하다. 사실 후자의 모델에는 이중직이라는 단어조차 불필요하다.

바울의 공동체는 천막 장사를 하는 바울에게 이중직 사역자라는 수식어를 붙이지 않았을 것이다. 현대의 목회자들이 바울처럼 일반 시장에서 노동을 하는 것은 더 이상 성직자의 이중직 담론이 아닌, 교회론적 맥락에서 바라보아야 할 선교적 담론이다. 더 나아가 이후에는 노동에 대한 그리스도인의 영성 문제로 단순하게 다루어져야 한다.

나는 책을 만드는 직업을 가진 교회 사역자다. 아주 예전에는 이중직 담론의 신학적 타당성 근거에 집중하기도 했다. 그러나 현재는 그리스도인의 노동 윤리에 집중하고 있다. 신학을 전공한 이로서 옳은 방식으로 일을 하며 나의 교회 공동체와 사회에 선한 기여를 하고 싶다. 사실 나뿐만 아니라, 교회의 가족 모두가 이러한 두 가지 정체성을 가지고 세상과 교회를 가꾸고 있다. 아래의 유명한 바울의 말은 신학 전공자만을 위한 것이 아닌, 교회를 세워 가는 모든 신자를 위한 것이다.

“우리는 여러분 가운데 아무에게도 폐를 끼치지 아니하려고, 밤낮으로 일을 하면서 하나님의 복음을 여러분에게 전파했습니다”(데살로니가전서 2:9). 

최병인 | 뜰힘 출판사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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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실과 팩트 2023-07-11 21:28: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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