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자가 생기면서 계급이 생겨났다. 문자를 만들고 선점한 이들이 문자로 권력을 행사하면서 칼 마르크스가 말한 원시 공산사회의 붕괴가 시작되었다. 숫자가 필요하지만 그것이 더 큰 권력을 가져다 준다는 데까지는 생각이 미치지 못한 문자의 선점자들은 문자를 통해 그들이 필요한 계산 정도는 할 수 있었다. 아라비아 숫자가 생기기 전까지 모든 알파벳은 수의 역할을 대신했다. 히브리어와 고대 그리스어가 그랬고 한자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수를 표기하는 한자가 독립적으로 존재하기는 했지만 어디까지나 문자였다.
수학하면 인도를 빼 놓을 수 없는데 0의 개념을 제일 먼저 발견했다는 점이 독특하다. 숫자는 뭔가를 계수 계량하는 것인데 곡식이든 가축이든 눈에 보이는 것이 분명한데 ‘없다’는 개념이 이해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불교의 공도 이런 0의 개념에서 나왔다. 그러나 0의 가치를 종교와 철학으로 가져오기 까지는 오랜 세월이 걸렸다.
베다 수학이 시작된 것을 기원전 1200년으로 보면 붓다가 활동하던 시기와는 600여년의 차이가 있다. 하지만 그 세월을 통해 숫자는 철저하게 권력이 되어 인도의 카스트 신분제도 정착에 영향을 미쳤다. 수학적 발전은 특정 계층에 의해 독점되었으며, 다른 계층이나 사회 구성원들은 이러한 지식을 얻을 기회가 제한되었다. 이는 카스트 제도의 특성상 교육과 지식의 독점이 사회적 권력을 유지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크리스티아 프릴랜드의 ‘플루토크라트: 현대의 새로운 초엘리트와 그들이 세계를 어떻게 바꾸고 있는가’(열린 책들)는 오늘날의 경제적 불평등과 권력 집중 현상을 분석하는 책으로, 초부유층이 어떻게 정치, 경제, 사회적 영향력을 행사하는지를 파헤친다. 이들은 단순히 경제적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정치적 결정에도 깊이 관여하며, 심지어 법 제정과 정책 결정에까지 관여한다. 이러한 현상은 미국에서 특히 두드러지며, 최근의 정치 현실은 그들의 강력한 영향력을 잘 보여준다.
미국에서는 대기업과 금융 엘리트들이 정치에 막대한 자금을 투입하며 자신들의 이익을 대변하는 정치인을 후원한다. 이 과정에서 민주주의의 본질이 훼손되고, 사회적 불평등이 더욱 심화되고 있다. 이러한 흐름은 프릴랜드가 강조한 플루토크라시의 전형적인 특징으로, 부유층이 자신들의 경제적 이익을 보호하기 위해 정치권력을 장악하려는 경향을 보여준다.
미국 민주당 전당대회에서 뛰어난 연설로 대중을 압도한 뉴욕 제 14선거구(브롱크스·퀸스) 알렉산드리아 오카시오-코르테스(AOC )의원이 연설에서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이 재선되면 미국을 “1달러에” “팔” 사람이라고 비난한 것은 미국 금권 정치의 현실을 가장 잘 보여주는 발언이다.
한국과 미국은 그런 점에서 조금 다르다. 한국에서는 플루토크라트의 정치적 영향력이 상대적으로 제한적이라는 점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는 한국이 진보 정권 하에서는 정치적 개혁을 통해 정경유착을 해소하려는 노력을 지속해왔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재벌의 정치적 영향력은 무시할 수 없는 수준이다. 다만 미국처럼 대놓고 개입하는 것이 아니라 외형적으로는 정권에 굴복하는 척 하면서 국가 경영에는 관심이 없고 제 배만 부르면된다는 생각이 지배적이다.
미국의 초부유층들의 행태는 때로는 전쟁을 부르고 죽음과 굶주림을 상업화한다. 이것도 제 배 불리기와 다름없지만 옳고 그름을 떠나 적어도 미국의 ‘국익’에 반하지는 않는다. 반면 한국의 재벌들은 겉으로는 권력자들과 시장통에서 떡볶이를 함께 먹어주며, 은밀한 곳에서 술잔을 나누면서 굴복하는 척하지만 그들의 눈에 국익은 보이지 않는다.
한국, 미국할 것 없이 자본을 가진 세력들은 여러가지 자선으로 그들의 만행을 뒤덮는다. 천문학적 기부활동으로 자신의 성공을 뽐내는 이른바 박애 자본주의자들이 그들이다.
박애자본주의자들의 야심은 기부 단체의 운영방식을 바꾸는 것에서 끝나지 않는다. 그들은 국가의 운영방식도 바꾸고 싶어한다. 2010년 MIT에서 빌 게이츠는 학생들에게 이렇게 설명했다.
에이즈 치료제를 제공하는 일에 대해 생각해 봅시다. 안지오텐신 II 수용체 길항제를 아프리카 지역에 효과적으로 보급할 수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기 위해 우리는 먼저 보츠나와에서 예행실습을 했습니다. 그리고 나서야 미국 정부의 단일 원조 프로그램에도 불구하고 우리 재단 전체보다 훨씬 더 큰 50억 달러 규모의 에이즈 퇴치를 위한 대통령 비상 계획PEPFAR 이 들어왔으며 그동안 이 경험을 바탕으로 규모를 늘려나갔습니다.(플루토크라트)
이처럼 박애 자본주의자들은 정보를 독점해 원래 의도와는 무관하게 국가들 전체의 사회 안전망에 왜곡을 가져올 만큼 강력한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다. 그들의 선한 일을 왼손에 감추기는 커녕 세상에 떠벌리면서 박애를 가장해 최소 투자, 최대 이득의 효과를 누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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