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민기의 쾌유와 옥사나의 명복을 빌며

김민기와 한대수

  • 기사입력 2024.06.08 09:10
  • 최종수정 2024.06.09 02:11
  • 기자명 글벗

어린 시절 동네에서 동네에서 벗들과 놀고 있으면 어떤 영감님이 지나가면서 여러가지 이야기로 우리 무리에 끼어 들었다. 딱히 틀린 말은 아닌데 뜬금은 없었다. 공을 차고 노는 아이들에게는 귀찮은 존재여서 그를 놀리고 나서야 그 영감은 자리를 뜨는 일이 항상 반복되었다. 나는 놀리는 축은 아니었고 그가 많이 외로워 보인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느날 집에 돌아가서 아버지에게 이 이상한 할아버지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 아버지는 너희들이 놀릴만한 분이 아니라며 그는 1950년 대 연세대 신학대 초대 대학원장을 지낸 한영교라는 신학자라고 알려 줬다.

중고등학교 시절 가수 한대수의 음악이 들리기 시작했다. 한대수는 한영교의 하나밖에 없는 손자였다. 한대수의 아버지는 미국으로 핵물리학을 공부하러 떠났다가 홀연히 사라졌다. 한대수가 수소문 끝에 미국에 가서 찾은 아버지는 믿기지 않을 만큼 변해 있었다. 미국 여성과 살고 있으며 21살에 유학을 떠난 사람이 한국말을 깡그리 잊어 버린 상태였다. 시기적으로 보면 그 영감님이 동네 꼬마들과 말싸움을 할 때 외아들(한대수의 아버지)의 변한 소식을 들은 지 몇 해 되지 않았을 때였을 것이다. 치매(그 때는 노망이라고 불렀다)라고는 할 수 없지만 영감님이 약간 정신 나간듯해 보였던 이유가 훗날 한대수의 가족사 이야기를 듣고 이해가 되었다.

한국 출신의 핵물리학자의 기이한 변화에 대해 음모론적인 이야기도 많이 떠돌지만 모든 음모론이 그렇듯이 밝혀진 것은 없다.

이글은 본래 ‘김민기와 한대수’라는 제목으로 준비하던 글이었다. 자료 수집을 위해 한대수를 검색했을 때 제일 먼저 뜬 기사가 한대수의 아내 옥사나가 세상을 떠났다는 기사였다. 20살정도 차이나는 몽골계 러시아 여성과 결혼하고 딸까지 두었을 때 가족과 함께 TV에 나온 한대수는 참 편안해 보였었다. 이제 정말 그가 추구하던 자유를 찾아 훨훨 날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었다. 그러다가 옥사나의 알콜 의존증이 알려지고 다시 미국으로 이주했었는데 옥사나가 지난 달 31일에 세상을 떠났다는데 10일만에 알려진 것이다.

한대수와 김민기. 김민기는 ‘뒷 것’이라 불리기를 원했다는데 그런 작명을 하자면 한대수는 ‘이상한 것’이었다. 뒷 것과 이상한 것의 음악은 서로 다르지만 둘다 나름 시대에 저항했다. 김민기는 저항가수로 분류되는 것이 싫다고 하지만 어쨌든 그 둘은 시대 정신과 다르다는 것만으로 저항의 아이콘이었다. 한대수는 가족사의 비극과 틀에 박힌 사회에 노래로 저항했고 김민기는 노랫말 자체가 시대의 아픔을 담고 있었으니 말이다.

김창남은 그의 책 ‘김민기'(한울)에서 1970 년 지나치게 미국적이라고 비판하며 썼던 한대수론을 반성하면서 이렇게 쓰고 있다.

한대수 음악이 보여주는 도저한 자유주의를 제대로 이해하고 수용하기에 우리의(혹은 나의)의식은 너무 편협했고 우리의 문화적 레퍼런스는 너무 빈약했다. 무엇보다도 가파른 사회과학적 인식과 민족주의가 앞서 있던 당대의 상황에서 문화를 보는 우리의 시각은 지나치게 협소했다. 그런 우리의 협소한 시각에서 한대수의 음악이 과소평가되었던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20년 가까운 세월이 흐른 지금 나는 위 글에서 드러나는 우리 세대의 넉넉지 못했던 하지만 당시로서는 다소 불가피하기도 했던 편협함이 이후 음악 운동에 풍요로운 발전을 제한했고, 그 결과가 현재의 허망한 상황에까지 연장되고 있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지금 성공회대에서 후학을 가르치는 김창남은 한대수의 '미국식' 자유를 수용하기에는 그 시대가 주는 정치 사회적 중압감에 너무 눌려 있었던 것 같다. 나는 1970년대에도 한대수의 자유가 좋았다. ‘행복의 나라로’는 많은 가수들이 리메이크해서 어느 것이 좋다고 말할 수 없지만 ‘물 좀 주소’는 그만이 부를 수 있는 노래였다. 만약 김창남이 한대수의 슬픈 가족사 그 중에서도 초등학교 아이들의 놀림감이 되던 할아버지 한영교의 쓸쓸함을 알았더라면 한대수에 대해서 조금 넉넉한 평가를 내리지 않았을까?

김민기 다큐 3부작에서 김민기를 이야기하는 출연자들
김민기 다큐 3부작에서 김민기를 이야기하는 출연자들

 

SBS 3부작 다큐김민기'가 많은 후일담을 생산했다. 김민기는 그의 말처럼 늘 뒤에서 묵묵히 있었다. 그렇다고 배후 조종같은 거창한 이름은 아니었다. 그가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곳에 늘 음악으로 함께 있었다. 농민들과, 공장 노동자들과, 어린이들과, 딴따라들과 항상 진심으로 함께 하던 모습이 다큐에 담겼다. 농사를 지으러 내려가 있을 때 동네 결혼식이라도 있으면 발벗고 나선 김민기의 모습에 먹물로 농민을 계몽하려는 모습은 전혀 찾을 수 없었다.

김지하는 김민기를 이렇게 회상한다.

그 무렵 서울대 미대 회화과에 갓 들어온 김민기의 노래를 듣던 기억이 새롭다. 세 곡을 내리 들었던 기억이 난다. ‘길’, ‘혼혈아’, 그리고 나머지 하나는 제목이 기억나지 않는다. 찢어지고 해진 청바지에 잠바를 걸치고 기타를 치며 심상치 않은 우울 속에서 저 밑바닥의 밑바닥으로부터 올라오는 깊고 애잔한 저음으로 미군부대 근처에 버려진 혼혈아의 슬픔을 지극한 데까지 들어올려 노래 부르는 ‘혼혈아’. 그리고 ‘길’에서 우리 앞에 놓여있는 여러 갈래 길의 혼돈이 가져오는 아린 상처를 건드리는 듯 고통에 가득 찬 노래를 불렀다. 그것은 그러나 노래가 아니었다. 차라리 아슬아슬하게 절제된 통곡이었고, 거센 압박 속에서 여러 가지 색채로 배어나고 우러나는 깊이 깊은 우울의 인광(燐光-도깨비불)이었다. (김지하 회고록)

김민기는 이러한 찬사가 부담스러웠을 것이다. 김지하가 기억하는 이날의 모임은 주로 엘리트 출신들의 문화계 인사들이 모여서 만든 PONTRA라는 단체의 모임이었다. 단체의 이름은 poem on trash의 머릿 글자를 땄다고 한다. '쓰레기 위의 시', 민주와 개혁과 계몽,진보, 자유를 독점하려 했던 먹물들다운 이름이었다. 그런 김지하에게는 문재인보다 박근혜가 더 마음에 들었을 것이다. 한 사람은 우리의 지도를 잘 따를 것 같고 다른 한 사람은 우리를 지도하려는 사람처럼 보였을지도 모른다. 나는 김지하가 기억하는 그날의 모임에 참석했던 김민기가 거기서 먹물들의 위선을 봤다고 감히 짐작한다 .

이러한 장면은 김민기 다큐에도 나온다. 김민기와 함께 야학을 하던 시절을 회상하던 3명의 한국 사회 최고 기득권의 자리에 있는 사람(그들의 젊은 시절 노고까지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들이 만든 영어교재 내용에서 I am a laborer. You are an owner. 를 김민기가 고치자고 했단다. 도대체 그들은 무슨 생각에서 야학의 학생들을 노동자로 명토박아 두고 싶었을까? 별 문장 같지 않지만 김민기는 뼛속까지 섬세하고 공감하는 사람이었기에 이 문장이 눈에 거슬렸던 것이다.

암 투병중인 김민기의 쾌유와 옥사나의 명복을 빈다.

‘꼬리를 무는 독서 일기’ 지난 주제 #뉴진스

'꼬리를 무는 독서 일기' 이번 주제 #김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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