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민기가 바꾼 한국 검찰청의 영어 표기

야학의 취지는 신분제의 고착화?

  • 기사입력 2024.07.13 13:30
  • 최종수정 2024.08.24 14:54
  • 기자명 글벗

SBS에서 방영된 김민기 다큐 3부작에는 야학 교사를 하던 시절을 회상하던  한국 사회 최고 기득권의 자리에 있는 세 사람이 나온다. MBC 아나운서를 하다가 삼성 계열의 고위직으로 자리를 옮긴 이인용, 그의 이름을 검색하면만석꾼 집안 아들 연관 검색어로 나오는 김한 JB금융 회장(), 이명박 정부 때인 2009 8월부터 2011 7월까지 검찰총장을 지낸 김준규가 그들이다. 학생 운동이 극심하던 시절 이들은 용기까지는 없었고 야학같은 교육 운동에 투신했을 것이다. 그들의 젊은 시절 결단도 결코 쉽지 않았을 분명 칭송의 대상이다.

그들이 만든 영어교재의 문장이 김민기에게 거슬렸다. 그들의 요청으로 잠시 도와주러 왔던 김민기는 I am a laborer. You are an owner라는 문장을 지적했다. 이런 계급의식을 고취하는 영어문장을 김민기가 빼자고 했단다. 3명은 깊은 깨달음을 얻었다고 회상했다.

대한민국 검찰청의 영문 표기는 Prosecutors' Office였다. 그것이 Prosecution Service 변경되었다. 국민 위에 군림하는 권력기관 이미지를 벗고 국민을 위한 봉사기관임을 강조하기 위한 의도였다. 이것은 당시 검찰 총장인 김준규의 아이디어였다고 전해진다. 김준규는 야학 교사를 하던 시절, I am a laborer. You are an owner 지적한 김민기에게 크게 영향을 받았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여기서 야학의 모순이 드러난다. 젊은 시절 그들의 헌신이 가져다준 자부심, 이후 삶에서 야학 교사로서의 기억이 선한 영향력이 되었던 점은 인정하지만 야학의 피교육자들에게는 어떤 효능이 있었을까?

자기가 속한 계층에 구애받지 않고 개인의 능력에 의하여 계층이동을 있는 사회가 이상적인 사회일 터인데 야학이 과연 그런 결과물들을 내었을까? 피교육자들은 교육자들의 환경(스펙)에 주눅들어 오히려 그들을 동경하든지 신분차를 확인하는 결과가 나오지 않았을까?

이런 점은 한국에서 처음 야학을 시작한 윤치호때부터 이미 예견된 것이었다. 윤치호가 1908년에 펴낸  ‘노동야학 독본 삽화를 보면 서양식 복장을 유길준이 누추한 복장의 노동자에게 하는 말이 나온다.

고문의 말씀 : 여보, 나라 위하여 일하오, 사람은 배워야 합니다.

노동자의 대답 : 고맙습니다. 그리하겠습니다.

구도가 산업화 시대에도 그대로 적용되었던 것이다. 

 

윤치호는 이렇게 말한다.

노동하는 동포들은 어찌하여 아랫 사람 되었는가. 재주없고 천량(재산) 없어 사느라고 되었으니 이미 아랫 사람이 되었거든 아랫 사람 되는 도리를 지킬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나라의 법이 허락지 않아 질서를 문란케하는 죄인된다. 질서를 지키어 위아래가 조화한 후에야 국권회복이 것이다.

(유길준, 노동야학독본, 조윤정 편역, 도서출판 경진)

이처럼 한국의 야학은 노동야학으로 시작했는데 노동자를 효율적으로 관리하기 위해 교육이 필요했던 것은 아닐까?  1930년대 들어서 시작된 이른바상록수적 야학’(심훈의 소설 상록수에서 따온 명칭) 애국계몽운동, 혹은 농촌문화운동의 성격을 띠었다..

예를 들어 ‘뒷간, 부엌 소제나 깨끗이 하고 문화생활에 지장을 주는 문맹퇴치나 하면 평화롭고 행복하게 있다’는 등의 계도 활동을 통해 농민의 피폐한 삶이 가난하고 무지하기 때문이라고 가르치려 했다. 여기서 농촌을 가난으로 몰고간 식민지 수탈은 감춰진다.

결국 야학운동은 노동자를 비롯한 사회의 혜택을 못받은 계층들에게 모순의 실체를 은폐하는 효과가 있었다. 물론 전태일 분신이후 노동자들의 각성을 요구하면서 단체 쟁의와 노동 조합결성에 야학이 기여한 것은 부정할 없지만 그들은 항상 감시와 핍박의 대상이어서 대중 운동으로 자리잡기 힘들었다. 앞서 말한 야학 교사를 하던 사람의 회고에서 드러나듯이 피교육자들에게노동자다움을 심어주는 영어 교재를 동안 사용하면서도 문제점을 몰랐던 것이다. 김민기를 만나기 전까지는.

단지 야학의 문제가 아니라 오늘날 교육도 예외는 아니다. 특목고, 자사고, 과학고 등으로 분류되는 신흥 명문과 아파트값과 무관하지 않은 강남의 사교육 열풍, 파생물로서 학력자본의 계승이 우리 사회를 병들게 만든다.

일리히가 말하듯 학교는 현대의 종교이다. 교회는 지상에서 착취 받는 자들에게 천국을 약속한다. 학교도 교육을 통한 평등을 약속한다. 교회와 학교는 실제로 극소수에게 이익을 부여하나 평등의 환상을 심어준다. 서구나 미국에서도 빈곤한 가정이 부유한 가정보다 많은 교육세와 사회보장비를 부담한다. 부유한 사람들을 위해 가난한 사람들의 돈을 착취한다. 교육은 경제적 착취를 합리화한다. 가난한 사람들은 머리가 나쁘고 능력이 부족해서 교육에서 실패했고 낙오했다고 생각한다. 그리하여 교육에 대한 맹신이 더욱 뿌리 깊게 심어진다. 단적인 실례가 한국의 교육병, 교육 중독이다.

이반 일리히(박홍규 옮김 해설), ‘학교 없는 사회’, 생각의 나무, 옮긴이 해설 중에서, 옮긴이 박홍규는 한국의 대표적인 아나키스트 연구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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