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8 민주화 운동 당시 시민들의 구호에는 ‘북한은 이 사태를 오판하지 말라’는 것이 있었다. 우리의 봉기는 민주화를 위한 열정에서 나온 것이지 북한이 좋아할만한 혼란이 아니라는 취지였다. 미국에 대해서 시위대는 폭력진압사태 해결을 위한 호소를 잊지 않았다.
결과는 신군부의 무자비한 살육으로 끝났다. 그리고 작전권을 가지고 있던 미국이 병력의 이동을 허락했다는 열패감은 한국에서 반미운동이 본격적으로 시작한 계기가 되었다. 트럼프 2기 정부에서 확실하게 새겨야 할 부분이다. 자발적 친미일 정도로 미국에 우호적이었던 대한민국이 카터의 5.18 묵인 이후 세계 모두가 미국에 굴복한 21세기에도 여전히 반미 구호가 나오는 나라가 되었으니 말이다. 게다가 한국의 진보진영의 든든한 후원군으로 여겨지던 미국 민주당, 특히 바이든 정부는 윤석열 정부의 든든한 후원자로 인식되면서 한국내 진보 진영의 반미감정은 더 악화되었다. 트럼프 당선을 바라던 사람들이 한국 진보진영에 적지 않았던 이유이기도 하다.
1980년대 반미와 함께 친북도 들어왔다. 한국 전쟁 이후 미국과 날선 각을 세워온 북한이 옳았다는 생각이 대학가에 자리잡았다. 어리석게 미국을 바라보다가 결국은 그들도 자국의 이익을 위해 불의한 집권자와 손잡는 것에 배신한 시민들은 ‘주체’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김일성의 주체사상이 대학가를 점령한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마르크스 –레닌보다 김주석은 대학가에서 ‘위수동(위대한 수령 동지)’로 불리면서 진보운동의 토대로 자리잡았다. 이제 학생들의 적은 전두환 따위가 아니라 미국으로 넘어갔다. 미문화원 점거사건도 모두 그 즈음에 일어났다.
김일성의 어떤 면이 그렇게 매력적이었을까? 전미영의 ‘김일성의 말, 그 대중 설득의 전략’(책세상)에서 저자는 "아무리 강한 자라 할 지라도 힘을 권리로, 복종을 의무로 변화시키지 않는다면 언제까지나 지배자가 될 수 있을 정도로 강한 것은 아니다"라는 루소의 말을 들며, 김일성이 바로 이 말을 가장 잘 이해하고 실천한 지도자라고 말한다.
이어서 전미영이 분석한 김일성의 언어 전략은 대중이 알기 쉬운 말을 사용해서 같은 단어와 문장을 반복하여 설득력과 호소력을 강화한다. 또한 민족어 사용을 권장하여 노동자 농민의 정체성을 일깨우고 체제의 정당화를 공고히 한다는 것이다.
그중에서도 저자는 ‘마법적 언어’에 주목한다.
주체란 철학적 인식의 주체를 말하는 동시에 사회역사의 인민주체, 반사대주의로서의 민족 주체를 의미하는 한편 주체사상의 개념인 자주성과 창조성의 관점을 의미하기도 한다. 이런 다의성과 함축성은 주체를 ‘마법어’로 만드는 데 일조한다. 카시러(Ernst Cassirer)는 정치신화를 구성하는 첫 조치로 언어조작을 들었으며 이때 원시사회에서 있음직한 마법어가 주조되고 있다고 경고한다.
여기서 마법어란 기술적, 논리적 언어와 상반되는 감정적이고 개인의 판단력과 비판적 식별력을 잠재우는 제의적 언어를 의미한다. 주체는 바로 이러한 의미에서 마법어의 역할을 한다.
(김일성의 말, 그 대중설득의 전략)
막스 베버는 탈주술화(Entzauberung)라는 말을 통해 ‘주술로부터 세계를 해방한 합리화과정’을 근대 세계의 특징으로 보았다. 하지만 북한은 타의에 의해 밀폐된 사회를 유지하면서 마법화(주술화)가 강화되었다. 그들이 무지해서라기보다는 ‘외세’로부터 민족을 지키는데는 또 그만한 것이 없었다는 점에서 꼭 그 사회의 탓으로만 돌릴 수 없는 것이 현실이다.
대한민국의 NL계열 초기 리더들은 이런 주술화는 외면하고 합리성으로 북한을 바라보려고 했다. 김일성의 항일 투쟁경력, 미국과 맞서 온 주체적 역량, 인민의 평등 등등은 충분히 ‘합리적’이다. 그러나 그 ‘합리’라는 것들은 설득과 강압이 잘 조화된 김일성의 전략에 의해 마법의 도구로 사용되었건 것을 그들만 모르고 다 알고 있었다. 합리적 신뢰는 그 자체로 ‘마법’이 될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남한 지배구조를 경멸하면서 ‘마법’에 빠져 들었다.
‘강철서신’의 저자 김영환은 북한에 가서 그 ‘합리’가 깨진 것을 보았다. 그리고 남으로 돌아와서는 은둔의 세월을 보내다가 ‘뉴라이트’의 기초를 놓았다.
현 정부에서 뉴라이트들을 전면에 배치했다. 그럴듯해 보이는 억지 사료로 식민지 근대화론, 자발적 종군 위안부론, 이승만 국부론을 내세우면서 나름 ‘합리’와 ‘공정’을 강조한다. 하지만 이들은 뉴라이트 선배들이 그랬던 것처럼 주술 정국에 매료되어 열심히 복무하고 있다. 복무하는 그들의 '열정(?)'이 설득력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어떤 이의 '말'에 의해 번번이 무너질 때마다 어떤 생각이 들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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