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데올로기와 종교의 차이점을 들라면 수도 없이 많겠지만 공동체와 개인 중 어느 것에 방점을 찍느냐도 차이를 만드는 것 중에 하나일 것이다. 80년대 주체 사상에 집중한 이들이 민족사와 분단 에 관심을 가진 것은 높이 살만했지만 개인에 대한 성찰이 부족했다. 주체사상에 푹 빠졌던 이들이 빠져나와 기댄 곳이 뉴라이트였으니 뉴라이트는 출범부터가 흠결을 가질 수 밖에 없었다.
개인의 문제에 관심을 가진 그들 중 일부는 ‘솔방울로 수류탄을 만들고 나뭇잎으로 강을 건너는’(보통 알고 있는 것과 다르게 북한은 이 우화를 인정하지 않는다)것이 가능한 종교로 옮겨 탔다. 동구권 몰락과 북한의 아사(餓死)사태 이후로 그들 중에 오순절파 개신교와 증산교, 그리고 대순진리회 등으로 흩어진 사람들이 많았다.
대한민국의 경제가 발전하고 일부 공동체적 의제(전국민 의료보험, 국민연금, 저소득층에 대한 지원)들이 정치를 통해 개선되자 형식적으로라도 사회 의제에 관심을 갖던 종교는, 특히 한국 교회는 개인 의제에 집중하면서 대놓고 ‘기복신앙’을 강조했다.
물론 모든 종교에서 개인의 화복이 중요하지 않은 적이 없었다. 종교 개혁이전에는 교회가 ‘알아서 다 해주는(?)’ 사회였고 종교개혁이후 개신교에서 개인의 입지가 넓어졌지만 ‘반가톨릭’으로 공동체성을 유지할 수 있었다. 프랑스 혁명은 교회를 개인의 영역으로 가두었다가 미국의 독립전쟁과 남북 전쟁으로 교회의 공동체성이 회복되는 듯했다. 20세기 들어서 미국의 사회복음, 남미의 해방신학, 한국의 민중 신학이 신구교를 망라하면서 기독교의 황금기를 이끌었다.
그것도 잠시 동구권 몰락과 신자유주의의 발흥으로 그 동안 숨죽여 있던 개인주의적 신앙의 기세가 등등해졌다.
한국 사회에서는 개신교와 무속신앙이 이 즈음에 ‘호황’을 누렸다. 이미 1980년대 초중반 ‘세련된’ 개신교 대형교회가 출현하자 경제 호황과 민주화를 이루지 못한 헛헛한 패배의식이 맞물려 중산층 고학력자들이 대형교회로 몰려 들었다.
무속 신앙과 한국 개신교는 제도 교회로서의 차이만 있을 뿐 추구하는 이념은 똑 같았다. 마침내는 무속신앙이 권력의 영역까지 잠식했지만 교회는 그들을 위해 기도하고 후원했다. 윤 김 두 사람은 무속의 힘으로 민주주주를 파괴하고 영구집권의 ‘왕조’를 세우려고 획책했다. 그들 이름 주변에 얼마나 많은 술사(術士)들이 거명되었는가? 천공, 건진, 명태균 이번에 노상원까지. 또한 이런 짓을 하는 그들에게 동조한 고위관료, 판검사, 언론 종사자들은 얼마나 많았는가?
유학을 건국이념으로 삼은 조선조에서 무당의 신당들은 유생들의 공격을 쉬임없이 받았다. 그러나 2024년 무당이 판을 치는 정국을 비판할만한 유생 비슷한 계층의 사람들은 소수에 지나지 않았다. 어떤 점궤 때문인지 몰라도 윤석열 김건희는 몰락의 길을 자초했고, 무당춤보다 거룩한 춤과 노래로 장착한 젊은이들이 무속 정권 퇴출에 앞장 서고 있다.
1566년 조선(명종), 100~200명의 유생이 개성 송악산에 올랐다. 그곳에는 일곱 개의 신당이 있었다. 신당에는 신을 묘사한 신상들이 세워져 있었다. 무당들은 그 앞에서 굿을 하고 길을 가득 메운 남녀는 아낌없이 공물을 바쳤다. 유생들은 사당에 돌을 던지고 불을 질렀다. 그들은 신상을 끌어내어 절벽 아래로 던져버렸다. 국가에서 중단할 것을 명했지만 유생들의 파괴 행위는 계속되었다. (한승훈, '무당과 유생의 대결', 사우)
이와 달리 지역 유생들이 반대하고 국가가 나선 경우도 있었다. 1574년 선조 때 개성의 옛 성균관에 있던 공자와 열 제자의 상을 철거하라고 지시했다. 지역 유생들이 반대했음에도 불구하고 철거가 시행된 이유는 공자상 조차도 유교 이념과 상관없는 우상으로 간주되었기 때문이다.
8~9세기 동서방 교회 사이에 있었던 성상파괴운동을 방불케 하는 사건이었다.
무속을 대하는 ‘홍길동전’ 저자 허균의 자세는 2024년 한국의 사태를 정확하게 설명한다.
(인조 때) 허균(許筠)이 유배지의 성황당에 들렀다가 한 무당을 만났다. 무당은 비바람을 일으키는 신들의 분노를 잠재우기 위해 신상을 단장해주고 있다고 말했다. 허균은 향을 사르고 하늘에 신들을 탄핵하는 축문을 올렸다. 그러자 하늘에서 붉은 옷을 입은 신장(무당을 수호하는 신-필자 주)이 내려와 무당이 거짓말을 하고 있다고 폭로했다. 재앙의 원인은 백성들이 무당을 믿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위의 책)
신들이 분노해서 신상을 단장해 주고 있다는 무당의 말에 허균은 오히려 신들을 탄핵하는 제사를 드린 것이다. 이때 무당의 말은 거짓이며 재앙은 무당을 믿는 백성들이 자초한 것이라고 신장은 설명(보다 정확하게 말하면 허균의 설명)했다.
2024년 내란 정국에 무속과 관련된 해괘망측한 소리들이 떠다닌다. 계엄 당일 날 신들에게 잘 보이기 위해 김건희가 성형 수술을 받았다는 이야기가 진위를 불문하고 언론을 장식한다. 허균과 대화한 무당이 신상을 단장해준다는 것과 같은 맥락이다. 이것이 가짜 뉴스라고 밝혀져도 시민들은 가짜 뉴스를 탓하기 전에 충분히 그럴 수 있다며 뉴스를 소비할 것이다. 그만큼 윤김 부부와 무속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다.재앙의 원인이 무속 신앙에 있다는 것을 밝히지 않아도 우리 모두는 무속 때문에 망해가는 그들을 목도하고 있다. 대한민국까지 망하기 전에 그들이 속히 물러나야하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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