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의 6,70대라고 해서 팬덤 현상이 없었던 것은 아닙니다. 1969년 영국의 인기 가수 클리프 리차드가 이화여대 대강당에서 내한 공연을 할 때 팬들의 반응은 열광적이었습니다. 여성 관객들이 무대를 향해 속옷을 집어 던졌다는 전설같은 이야기들이 전해진 것이 바로 이 공연이었습니다. 손수건 선물 등은 무대를 향했지만 속옷은 과장이었다는 이야기도 있으니 사실은 당사자들만 알겠지요.
당시 언론과 언론에 가장 쉽게 흔들리던 중장년 세대는 이 공연에 대해 저마다 한마디씩 했습니다. 거기에는 여성에 대한 폄하도 한 몫했습니다. 60년대 였으니까요. 위에 소개한 문장처럼 ‘성차별적 도덕 관념’으로 무장한 ‘분노’가 정당한 것으로 대접받던 시대였습니다.
중진국 초입에 가까이 가있던 한국인들이 보는 서구사회는 발전한 사회인 동시에 퇴폐사회여야 했습니다. 그들에 다다르지 못한 경제 수준을 덮기위해서라도 기성세대에게는 ‘퇴폐’의 담론이 필요했습니다.
잠시 주춤하던 팬덤 현상은 70년대 들어 남진과 나훈아라는 두 거물의 팬클럽으로 나타났습니다. 시민회관(지금의 세종 문화회관)의 콘서트는 두 클럽 사이의 세 과시로 항상 과열되었고 심지어 폭력사태로 번지기도 했습니다.
이 때도 팬덤은 제대로 대접받지 못했습니다. 지식인층이 좋아하던 이른바 ‘세시봉’들과 남진 나훈아의 팬덤이 계층적으로 구별되면서 팬덤에 대한 폄하가 심해졌기 때문이죠.
남진 나훈아의 인기가 한 풀 꺾이자 연예인을 향한 애정은 팬레터나 선물공세의 형태를 띠면서 ‘개인적’인 것으로 인식되었습니다 .
개인의 팬덤 현상이 집단화한 것은 1980년대 후반부터 90년대 초반, 대학 농구 전성기에 연세대학과 고려대학 선수를 중심으로 팬클럽이 생겨나면서부터입니다. 이 즈음 가수 김건모 신승훈 팬클럽의 출범으로 남진 나훈아 때 나타났던 팬클럽의 계층화가 사라졌습니다. 마침내 2000년대 들어 정치인 노무현에 대한 ‘노사모’의 출현은 팬덤 현상이 정치적 영향력을 가지는 계기가 됩니다. 이후 K-Pop의 인기가 치솟자 팬덤현상은 문화시장까지 점령합니다. 그리고 응원봉을 시그니처 삼아 소속 팬클럽에 대한 자부심을 키워나갑니다.
그것이 2024년 윤석열 탄핵집회를 빛의 혁명으로 만드는데 기여했고, 여성들이 당당한 정치적 주체로 등장합니다.
마이클 본드의 ‘팬덤의 시대 - 개인과 사회를 움직이는 소속감의 심리학’에 따르면 연예인 또는 스포츠 맨들에 대한 팬덤 현상이 개인적 취향의 문제로 오해되어 온 것을 비판합니다. 또한 21세기를 개인의 시대라고 분석하는 것에 문제를 제기합니다.
스포츠 팬과 정치 지지자들은 팀이나 정당에 대한 새로운 정보를 거의동일한 방식으로 처리한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즉 이들은 단체에대한 소속감이라는 렌즈를 통해 정보를 걸러내는 것이다. 사람들에게 중요한 것은 정보 자체가 아니라 그 정보가 자신이 속한 집단에 반영되는 방식이다.
그동안 공연장에서 외쳐온 비명의 형태는 탄핵구호로 나타났고 ‘내가 만난 세계’같은 소녀시대의 노래는 새로운 운동가요가 되었습니다. 놀라운 일입니다. 그동안 팬덤현상을 개인적인 열광 정도로 폄하했던 구세대의 오해였습니다.
비명은 집단적 행위이자 감정적 행위이며, 기존 질서를 전복하는 한 종족의 의식이다. 비명은 강력한 소속감을 전달한다. 누구도 혼자 비명을 지르지는 않기 때문이다. 체스터대학교에서 대중음악 팬덤을 연구하는 마크 더핏은 이를 정치적 자유의 표현으로 인식한다. “소리를 지르는 여성 팬들은 자신의 영웅을 소유할 뿐만 아니라 그런 감정을 표현할 수 있는 집단적 권리를 소유한다.”
저자는 “팬들은 항상 자신이 속한 종족에 대해 끈질기고 때로는 비이성적인 충성심을 보여왔는데, 이는 정당 정치에서도 고질적 특성이 되었다”며 팬덤 현상의 우려도 언급합니다. 팬들이 모인 소속감이 배타적으로 표출될 수 있다는 점에서 전혀 의미없는 지적은 아니지만 적어도 2024년에서 25년 대한민국에서 보여준 각 팬클럽 별 응원봉의 연대는 새로운 정치현상의 시작이었습니다.
“팬덤의 시대 - 개인과 사회를 움직이는 소속감의 심리학”마이클 본드 (지은이),강동혁 (옮긴이)어크로스2023-11-21 원제 : Fans (2023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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